2013년 7월 31일 수요일

그 많은 교파는 누가 다 만들었을까?? (전세계 2만여개 종파, 세상에 유일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하나님의교회)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이며 새언약을 지키고 전하는 교회입니다.하나님의교회 오셔서 생명수 축복 받으세요}
 




그 많은 교파는 누가 다 만들었을까

세계 2만여 개.
대한민국 200~250여 개.


이 숫자는 오늘날 존재하는 기독교 교파의 수(數) 다. 심지어 어느 교파의 경우, 하나에서 53개의 교단으로 분리된 곳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아래 많은 교파들이 존재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장로교: ‘칼뱅’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성립한 그리스도교의 개신교 교파.
침례교: 영국의 청교도(퓨리턴)의 여러 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J.스미스’(1554?∼1612).
감리교: 성공회 사제인’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과 부흥 운동으로 등장한 개신교 교파.  
성결교: 1901년(광무 5) 2월, 동양선교회 속 선교사인 ‘C.E.카우만과 E.A.킬보른’에 의해 세워진 개신교 교파.
루터교: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복음주의 사상에 따라 세워진 개신교 교파.
구세군: 그리스도교 교파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창설한 교파.
성공회: 로마교회에서 분리, ‘영국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하여 성립한 교파.

눈을 의심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파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바탕으로 세운 것들이다.

궁금하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창설하신 교회는 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문안 드립니다. (표준새번역 고전 1:1)"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시고 사도 바울과 거룩한 성도들이 다닌 교회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교회’다. 그곳은 예수님의 피로 언약한 새 언약 유월절 진리가 있다.

행 20:28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전 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사도 바울이 유월절의 가치를 모르는 성도들을 책망하는 장면이다.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 유월절을 소중히 여겼으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파들 중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하나님의 교회를 찾았는가.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워주신 교회요 당신이 찾아야 할 곳이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단하나 하나님의교회

르완다는 무엇을 말하나??


르완다는 무엇을 말하나??


'르완다 대학살'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시 르완다에는 다수 부족인 후투족과 소수 부족인 투치족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후투족 출신인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비행기 격추 사고로 사망하자 후투족은 이를 투치족의 소행이라고 간주하고 보복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인종청소의 의미도 포함돼 있었다.

후투족 정치인과 언론인, 종교인들은 투치족 학살을 선동했다. 이에 평범한 후투족 주민들은 너무도 쉽게 이 잔혹한 학살에 가담했다. 한 후투족은 투치족인 자신의 아내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으며, 후투족 청년들은 투치족인 자신의 친구, 직장동료, 이웃을 살해한 후 그 목을 몸에 착용(?)한 상태로 맥주를 즐겼다.

불행하게도 이 선량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몰랐다. 르완다 대학살은 증오심에 도취된 인간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단적인 사건이었다. 과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수많은 사람들을 살인자로 만든, 이 끔찍한 증오심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구성한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이에 대한 책임을 '증오연설죄'를 저지른 선동행위자에게서 찾았다. 증오연설이란 국가, 인종, 종족, 종교를 기준으로 자기가 속하지 않은 다른 그룹에 있는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파괴시킬 목적으로 악의적인 증오심을 부추기는 선동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대학살이 있기 2년 전부터 후투족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투치족을 멸절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글과 말을 쏟아냈다. 대중들은 "투치족을 멸절시켜야만 앞으로 평화가 올 것"이라는 이 지식인들의 증오심 가득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다수의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 자유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내에서는 기성교단의 횡포가 유독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불특정다수가 시청하는 기독교 방송에서도 '이단척결을 위한 연합예배'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기성교단 소속의 언론사에서는 매달 혹은 매일 이단사이비를 대비하거나 박멸해야 한다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기성교단 소속의 소위 이단감별사들은 교회나 여러 단체를 돌며 이단세미나 및 강제개종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이들의 말과 글을 접한 대중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행동을 하겠는가.

기성교단에서 발행한 잡지를 통해 이단감별사의 글을 접한 김 모 씨는 자신의 아내가 다니는 교회가 기성교단에서 지목한 이단이라는 사실을 안 후로, 사랑하는 아내를 폭행, 협박하기 시작했다. 김 모 씨는 잡지사 발행인의 소개로 이단감별사를 만났고, 그는 아내를 개종시켜야만 가정 파괴를 막을 수 있다고 선동했다. 이후 김 모 씨는 아내를 개종시키기 위해 더욱 상습적으로 심한 폭행을 가했으며 아내가 다니는 교회를 찾아가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또한 아내를 이단감별사에게 끌고가 강제 개종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개종이 실패되자 이단감별사와 공모하여 2001년 3월 22일까지 약 85일 동안 아내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기도 했다.

증오연설에 세뇌당한 사람들은 ‘반대편의 인종, 종교, 이념’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전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인 박선기 변호사는 “증오연설에 세뇌된 사람들은 살인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선동행위(증오연설)는 사람을 죽이는 것 이상으로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3년 7월 30일 화요일

언론보도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늘어머니

어머니, 성경은 하늘어머니 께서 계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성겨예언따라 이땅에 오신 하늘어머니 께서 함께하시고 새언약 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 오셔서 생명수 축복 받으세요~~^^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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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교회 언론보도 내용}
 
 



‘희생·사랑·연민·회한…아, 어머니!’


<전국매일/서울> 서정익 기자 = 부르면 부를수록 그리워지는 이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 붉어지고, 그늘졌던 마음에 따스한 한 줄기 볕이 스며드는 이름. ‘어머니’.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대명사인 우리네 어머니를 추억하며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이 6월 20일부터 7월 4일까지(22, 29일 토요일 제외) 13일간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총회장 김주철 목사) 서울강남교회에서 개최된다.

이 행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주최하고 멜기세덱출판사가 주관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번 전시회를 마련한 것은, 각박하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잊혀져가는 영원한 마음속 고향인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지친 삶에 한 줄기 희망과 따뜻한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편안하면서도 진솔하게 담아낸 문학과 사진 작품들을 통해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 가족 간의 정을 확인하고 이웃과 사회 전반에 따뜻한 어머니 사랑의 온기를 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회는 ‘어머니’를 주제로 한 문학동호인들의 작품과 멜기세덱출판사에 투고된 독자들의 문학작품과 사진, 그리고 어머니와의 추억이 오롯이 간직된 독자들의 소중한 소품들로 꾸려졌다. 전시 구성은 ‘희생·사랑·연민·회한…아, 어머니!’라는 부제를 갖고 총 4개의 테마관으로 기획됐다. 각 테마관에는 시와 수필, 편지글 등 글29편과 사진 21편, 그리고 어머니와 고향에 관한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추억의 소품 46점이 전시돼 있다.

A zone의 테마는 ‘엄마’이다. 이 테마관에서는 유명한 서정시인 도종환 님의 ‘어머니의 채소농사’ 외 2편의 시와 수필 3편, 수필만화 1편, 사진 4점과 추억의 소품 18점을 만날 수 있다. ‘엄마빵’(수필만화), ‘유년의 해질녘’(사진), ‘호롱’(소품) 등 어머니와 관련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글과 사진, 소품으로 조화롭게 구성된 작품들과 조우하다보면, 어느새 내 삶이 시작된 곳이자 유년 시절의 전부였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B zone의 테마는 ‘그녀’이다. 여기에는 ‘뿌리’(시), ‘어머니의 성찬’(사진), ‘아들 군대 보내는 날’(사진), ‘당신의 젊음을 꿰어’(사진), ‘옥반지’(소품) 등이 전시돼 있다. 작품은 시 2편을 비롯해 사진 11점, 소품 9점, 그리고 칼럼 5편으로 구성됐다.

애초에 당신도 무한한 꿈과 자유를 품고 살아가던 한 여자였지만 자녀를 갖게 되면서부터 ‘여자의 삶’을 버리고 희생과 고난, 아픔과 질곡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삶’을 택해야만 했던 우리네 어머니. 이 테마관에서는 좋은 것은 모두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하찮고 볼품없는 것은 모두 당신의 몫으로 여기며 살아간 우리 어머니의 희생이 녹아 있는 삶의 일상들이 사진 속 풍경을 통해 아련히 펼쳐진다. 사진에 그려진 어머니의 깊은 주름과 근심 걱정이 밴 눈길, 굽어진 허리에도 무거운 짐을 지며 자녀에게 돌아가는 어머니의 희생의 시간이 그려낸 애잔한 실루엣을 통해, 관람객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며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칼럼 패널 코너에서는 뉴스로 보도됐던 어머니들의 자녀를 위한 희생을 만날 수 있고, 과학 칼럼을 통해서는 자식을 위한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해답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엄마’라는 테마를 가진 C zone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깨달은 자녀들의 회한의 감정을 진솔하게 그려낸 편지와 글, 사진으로 구성된다. ‘어머니, 오늘은 편안하십니까?’(시), ‘어머니의 노을’(사진), ‘Dear 그리운 엄마!’(편지), ‘도시락 통’(소품) 등 시 1편, 수필 2편, 수필만화 1편, 편지글 3편, 사진 4점, 소품6 점이 전시됐다.

이 테마관에 구성된 각 작품들을 만나다보면, 당신의 삶을 버리고 자식에게 내리사랑만 부어주신 지고지순한 어머니의 사랑에 죄스럽고 숙연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괜찮다’라는 주제로 마련된 D zone. 여기에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동구’라는 시를 비롯해 ‘큰 별, 작은 별 그리고 아기 별’(수필), ‘당신이 웃으시는 이유는’(사진), ‘어머니의 편지’(소품) 등 시 1편, 수필 5편, 사진 2점, 소품 13점이 구성돼 있다.

이 테마관에서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무한한 용서와 신뢰, 끝없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문학인들과 독자들이건네준 작품들을 통해 우리네 어머니가 웃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인지 가슴 뭉클하게 전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4개의 테마관을 빠져나오면 전시회에서 느꼈던 감동을 고스란히 이어갈 수 있는 5개의 부 대행사가 마련돼 있다. ‘영상 문학관’ 코너에서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4편이 동화 같은 영상으로 상영된다. ‘마음 담아 불러보는 어머니’ 코너에서는 그동안 부르고 싶었던 이름 ‘어머니’를 마음껏 불러볼 수 있다. ‘사랑의 우편함’ 코너에서는 평소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들, “엄마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보고 싶어요, 미안해요, 어머니 감사합니다”라는 말들을 엽서에 담아 어머니께 보낼 수 있다. 이 엽서는 행사 주최 측의 무료 발송 서비스를 통해 어머니 손에 직접 전달된다. ‘포토존-어머니라고 말해요’ 코너에서는 관람객들의 사진을 무료 촬영·인화하는 서비스를 통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 마지막 ‘북카페’ 코너에서는 멜기세덱출판사가 출판한 문학집이 비치된 테이블에서 은은한 차 향기를 맡으며 전시회에서 받은 감동을 나눌 수 있다.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은, 글과 사진, 그리고 소품 속에 잔잔히 스며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소박하고 애틋한,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희생의 모습을 통해 어느새 우리의 삶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던 어머니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애오라지 가족과 자식만을 위해 모진 희생을 감내한 그 사랑에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청소년들에게는 우리의 어머니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고, 기성세대에게는 지나간 세월 동안 잊고 지낸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각계각층의 호응이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어머니’ 글과 사진전은 남녀노소 누구나 관람할 수 있고, 관람료는 무료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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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IS ...*하나님의교회
 


350년 만에 벗은 누명


350년 만에 벗은 누명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결국, 로마 교황청 종교재판소로부터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망원경을 통해 달의 표면이 로마 가톨릭이 신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달리, 울퉁불퉁하고 깊은 계곡과 만곡부, 광대한 돌출부가 있다는 것을 '직접 보면' 자신의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교황청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615년 로마를 방문했을 때 그는 지구의 자전에 따른 조수 현상이나 무역풍 등에 관해 강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순진한 것이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라도, 기존의 주류 체계나 신념과 맞지 않는 것은 철저히 배제당한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로마 가톨릭에게 있어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이며 하늘에 사는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는, 이 허무맹랑한 교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이의 어떤 과학적 주장도, 변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가톨릭 교리에 위배되며, 철학적으로 우매하고, 신학적으로는 이단적인 내용'이라며 '정해진 대로' 유죄를 선고했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 이후 피렌체 근교에서 연금된 상태로 여생을 보내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350여 년 만에 그는 이 치욕스러운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1979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이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실수였다고 인정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인정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천동설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선택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기존의 주류 체계 및 신념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갈릴레이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하나님의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켰으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이를 지키지 않았던 기성교회라 할지라도 이 모든 내용을 성경을 통해 '직접 보여주면' 믿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순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26장과 누가복음 22장, 고린도전서 11장 등을 통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켜야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영생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직접 보여줘도, 그들은 하나님의교회를 '성경을 잘 보는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역시나 그들에게 성경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쌓아온 기득권과 인맥, 체면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350여 년 만에 갈릴레이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처럼 진실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 드러난다.

2013년 7월 26일 금요일

당신의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가!? {성경의 증거하는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는요~ 새언약을 지켜요그리고 어머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요~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킵니다. 하나님의교회는요 재림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세우셨고 오늘날 유일하게 생명의진리를 전한답니다. 하나님의교회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가?

그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내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약속 장소에 나가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그의 반응은 냉랭하다. 심지어 나를 모른다고까지 한다. 그 때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당황스럽다 못해 원망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겠는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어느 누군가에게 반드시 현실로 일어날 일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께서 천국 문 앞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 자들이 누구였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주여 주여 부르짖을 만큼 믿음이 특별했고 평생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이적 기사를 행하며 열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왜 예수님께 외면을 당하고 천국에서 쫓겨났을까?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일서 2:3~6)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맹신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믿음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도 인정해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성경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안식일, 유월절과 같은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주신다.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요일, 성탄절, 십자가 숭배 같은 사람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가. 그런 자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에 없는 또 다른 하나님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의 반가운 만남을 기대하며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 만약 당신도 언젠가 만나게 될 하나님께 환영을 받고 싶다면 반드시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성경의 바른 해석은 오직 그리스도 께서만 해주실수 있습니다}[성경을 해석하면 이단?](하나님의교회)

성경은 오직 성경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뜻을 알려 주실수 있습니다.그래서 하나님 께서 이땅에 육체로 오셔서 성경의 구원의 가르침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중세 종교암흑세기 동안에 생명의 진리는 모두 훼파되어 그리스도 께서 다시 이땅에 육체로 오셨습니다.그리고 초림때와 동일하게 생명의 진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교회,그리스도 안상홍님)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름도 하나님의교회이며 오늘날 재림그리스도 이신 안상홍님께서 세우신 교회 이름도 하나님의교회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면 이단??




소위 이단감별을 한다는 어떤 목사는 ‘성경 비유를 해석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참 황당한 말이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13:34~35)



하나님께서는 원래 성경을 비유로 주셨다. 그런데 성경 비유를 해석하면 이단이라니, 성경을 해석하면 이단이고 성경을 해석 못해야 정통이란 말인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단 기준도 있을까? 안타까운 것은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에 많은 교인들이 현혹되어 진리를 분별치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한다고 해서 이단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면 멸망을 당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16)

성경을 억지로 풀면 멸망을 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풀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멸망 당한다. 그렇다면 어떤 성경 해석이 정확한 것일까? 먼저 성경은 사람의 생각과 지혜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뜻과 생각으로 기록한 글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글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19~21)

멸망받을 억지 해석은 사람의 생각으로 사사로이 푸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올바른 성경 해석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 바로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2:6~11)

예수님 당시에도 아무도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비밀을 오직 예수님께 듣고 배운 사도들만이 깨달을 수 있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한복음 6:45)

이는 예수님께 배워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4:7~9)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도 바른 성경 해석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1~5)

재림 그리스도께 배워야 올바른 성경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아무리 인간적인 지혜가 뛰어나도 재림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성경을 알 수 없다. 재림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모두 멸망 받을 억지해석에 불과하다. 예언 따라 재림하신 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는 성령과 신부의 비밀과 새 언약 진리를 비롯한 모든 성경의 비밀을 개봉하시고 하나님의교회를 세우셨다. 성경을 해석한다고 해서 이단이 아니다. 성경의 예언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새 언약 진리를 배척하는 것이 이단이다.

-------------------------------------------------------------------------성령시대 구원자 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
 


2013년 7월 25일 목요일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하나님의교회 , 어머니 하나님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성경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성의 형상의 아버지하나님과 여성의 형상을 지니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계심을 ...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친히 이땅에 오심을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하면 아버지만 떠올린다. 마태복음 6장 9절의 기도문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수없이 암송해왔고 귀에 익숙해진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기독교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Is It Okay to Call God "Mother"?: Considering the Feminine Face of God’이라는 책인데, 대략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거지?’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하나님의 남성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성경적 근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적인 하나님의 모성을 역설하면서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불러야 할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글 중에서 특별히 시선이 멈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f we here on earth believe that a c
hild grows up best with a father and a mother doesn't it also make sense that as a child of God we have a Heavenly Father and a Heavenly Mother?(이 땅에서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으로써 최상의 양육을 받을 수 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자녀 또한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 책의 내용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발견하고 인식했다는 점에서 크리스천들에게 너무나 쇼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많은 언론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www.watv.org ‘스페셜 리포트’ 참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26절을 통해 증거한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곧 우리 어머니”라는 말씀을 처음 보는 사람도 꽤 많은 것 같다. 필자도 처음에는 어머니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쉽지 않았다. 하도 금시초문 생소한 표현이라 한동안 당황했었지만, 성경에 있는 진리를 어찌 부인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옛말에 사람은 견문이 넓고 도량이 넓어야 하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 같다.

어머니 하나님?
궁금하세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로 오세요
하나님의교회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어머니 하나님께서
존재 하심을 증거 합니다
성경을 믿으면 어머니 하나님을 믿을수 있고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교회를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교회

하나님의교회?
세상에 유일하게 새언약 생명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성경 예언따라 이땅에 오신 하늘어머니 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온세상에 하나님의 참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교회 오세요
새언약 생명의 진리로 영생의 축복 받으세요
 
 
 
 


{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훼방한다. 아이러니하게 들리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성경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는 자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2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구원코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을 믿는 데 앞장섰던 자들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았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도록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사도행전 4:1~18)

하나님을 절대주로 섬긴다는 그들이,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예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성경)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5:46)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증거대로 오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과연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이런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한 권위서라는 사실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단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는 가톨릭이다.

1560년 12월 22일 로마 가톨릭은 종교재판을 통해 훌리안 헤르난데스라는 사람을 화형시켰다. 헤르난데스는 극악한 이단이란 판결을 받았다.

저 불경한 자들(프로테스탄트들)을 보호해 주고 있는 먼 나라들(독일) 등지에서 금서들(성경 전서 및 신약쪽 복음서들)을 스페인으로 비밀리에 생사를 걸고 밀수입해 온 자였다. ··· 그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사제들과 교통하시는 것과 같이 평신도들과도 교통하신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자이다. (짐승 위에 탄 여자, 데이브 헌트 저, 도서출판 누가)

헤르난데스가 화형된 이유는 어이없게도 성경을 배포하고 그것을 읽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고 있던 나라가 공산국이나 회교국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기독교 국가인 스페인에서 살았다. 하나님을 믿는 국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전파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리고 화형당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런 말도 되지 않은 일을 행한 곳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지금은 어떨까.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가톨릭은 평신도들에게 성경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던 가톨릭의 행위는 단지 과거의 잘못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가톨릭은 '성경은 오직 교회(가톨릭)만은 해석한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여전히 평신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다(가톨릭 교리의 요리문답(Convert's Catechism of Catholic Doctrine). 가톨릭에서 제시하는 성경 해석이 결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톨릭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들의 전통에 대한 권위를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아니, 오히려 전통을 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전통과 부합하는 내용이라면 그 즉시 성경의 내용을 배제시켜버린다. 십계명을 변경한 사례가 그렇고, 마리아나 성인 및 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그렇다. 성경을 제대로 믿는 자들이라 결코 이럴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훼방하고 대적하는 역사, 그것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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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시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 교회
하나님의교회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베우지도 않았는데 제자라고?? /제자라면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교회)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오늘날 유일하게 새언약 생명의 진리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켜행하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새언약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을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이 지키는 일요일 예배와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제자라 하니.....

그러나 하나님의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새언약 을 지키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베우지도 않았는데 제자라고? 





한 분야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의 제자는 그 스승의 이름만으로도 인정을 받는다.

한때 이러한 점을 악용한 사건이 있었다. 유명한 장인의 제자를 사칭한 것이다. 민 모 씨는 초대 국새 제작자이자 옥새 전각 장인 정 모 선생의 제자로서 옥새 전각법을 전수받았다고 자처하여 국새제작단장에 올랐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정 모 선생의 제자가 아니었으며 전통방식으로 국새를 제작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결국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정부와 전 국민을 속이고 국격을 훼손한 행위에 대해 엄한 형벌이 선고되었다. 제자를 사칭한 사람은 그 거짓이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스승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도 각 교파마다 그 가르침이 모두 다른 것은 어찌된 일일까? 스승인 예수님도 한 분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도 한 권뿐인데, 그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는 제자들의 말은 모두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시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지만 이제는 시대가 지났을 뿐만 아니라 지역과 역사적인 특징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예수님의 가르침은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생이 되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대로 행하도록 하기 위해 본을 보이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그대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 결코 제자들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 발전시키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제까지든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여 전하기를 힘썼다(고린도전서 11:1, 빌립보서 4:9, 빌립보서 3:16).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짓 선생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르친다고 하나 실상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자들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였다. 베드로는 그들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하였다(베드로후서 2:1).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이단은 거짓 선생들이며, 진리의 도를 훼방한다. 즉, 참 선생 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진리의 도를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는 거짓 제자들이다.

문제는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거짓말로 예수님의 제자를 사칭하는 자들을 구분하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받아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 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바로 저주 받을 이단임을 밝힌 것이다(갈라디아서 1:6).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 즉 우리의 스승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제자들이 신약성경에 기록하여 전하고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 분별할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먼저는 새 언약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누가복음 22:8), 주간 예배로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누가복음 4:16). 그리고 예배 예식으로는 남자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말고, 여자는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고린도전서 11:1).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일요일 예배를 지켰다거나 크리스마스를 지켰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온 세상의 수많은 교파와 교리 중에 과연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누구인가는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짜 옥새 장인의 거짓말은 진짜 옥새 장인의 기술을 재현하지 못한 데서 드러났다. 예수님의 가짜 제자들의 거짓말은 진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일 수 없는 데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서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교회가 난립된 오늘날, 구원의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전하는 참 제자 된 교회를 찾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님의 가짜 제자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힐링, 엄마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과 신부 되신 하늘아버지와 하늘어머니 께서
생명수 주시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늘어머니
께서 함께 하시고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교회는 하나님의교회가 유일합니다.
하나님의교회 는 성경 예언따라 세워지고 성경 예언따라 이땅에 오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 !

 
 
마음의 힐링 , 엄마
 
 
 
 



사진출처[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
부르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부를수록 그리운 이름. 우리는 그분을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찾아 삼만 리'는 1976년 일본에서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19세기 후반에 발표한 단편 동화 <아페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라는 작품을 각색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된 명작이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약 1만 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아홉 살 소년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떠난다는 내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다.

주인공 마르코에게 가장 큰 존재였던 엄마와의 소식이 끊기자, 마르코는 스스로 엄마를 찾아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힘겨운 여정에 오르는 소년 마르코의 모습에 애절한 주재가가 더해져 안타까움과 감동을 더했다. 특히 엄마와 마르코가 재회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부르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부를수록 그리운 이름. 우리는 그분을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찾아 삼만 리'는 1976년 일본에서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19세기 후반에 발표한 단편 동화 <아페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라는 작품을 각색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된 명작이다.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약 1만 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아홉 살 소년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떠난다는 내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다.


주인공 마르코에게 가장 큰 존재였던 엄마와의 소식이 끊기자, 마르코는 스스로 엄마를 찾아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힘겨운 여정에
어떻게 보면 케케묵은 고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지금 보아도 감동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엄마'라는 시대를 초월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필요한 사람은 마르코뿐만이 아니다. 엄마에게서 태어난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안식처, 엄마를 찾는다.

한편 영국문화협회에서 세계 102개국, 4만 명을 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조사했다. 결과는 'Mother(어머니)'였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따뜻함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정서인 것이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우리 영혼에게도 어머니가 존재한다. 어머니와 우리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하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다 그 품을 떠나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처지가 되었지만, 우리는 하늘 예루살렘 어머니로부터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은 존재들이었다(이사야 50:1, 이사야 49:15). 그런 우리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온갖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져가는 이유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이사야 66:13)

요즘 힐링 열풍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힘든 세상살이에 지친 내 영혼에게 편안한 안식과 위로를 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힐링의 효과가 일시적인 위로는 될지언정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다는 점이다. 진정한 힐링은 내 마음의 안식처이자, 내 마음의 고향이자, 나를 지으신 하늘 어머니의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다. 세상에 힐링 열풍이 부는 것도 어쩌면 우리 영혼이 하늘에서 받은 하늘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갈구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자, 하늘 예루살렘 어머니께서 당신을 찾아 먼 길을 달려오셨다. 부디 동화 속 주인공처럼 어머니를 찾아 당신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엄마 찾아 삼만 리'의 여정에 '행복'이라는 마침표를 찍길 바란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귀신의 처소 발견하는 "유월절" ?!


 

귀신의 처소를 발견하는 유월절(새언약)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요한계시록 18:1~2)

사도 요한은 귀신의 처소, 마귀의 소굴이 무너질 것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영광(靈光)은 귀신의 처소와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광채를 말한다.

이 광채는 무엇일까? 옛적 유다왕국의 왕이었던 요시야와 히스기야의 경우를 보면 귀신의 처소를 들여다볼 수 있는 광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지 18년째 되던 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는데, 율법의 말씀을 듣게 된 요시야가 회개하며 대대적으로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한 것이다. 그렇게 18년 동안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마음과 힘을 다해 지킨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월절을 지킨 요시야와 백성들이 나라 안의 모든 신접한 자와 박수와 우상을 제했던 것이다(열왕기하 22:8~11, 23:1~25).

히스기야 왕 시대에도 비슷한 역사가 있었다.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 이월 십사일에 유월절 양을 잡으니 ··· 이 모든 일이 마치매 거기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과 단을 제하여 멸하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그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역대하 30:1~31:1)

두 왕 모두 유월절을 지키고 난 후 우상을 없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유월절을 통해 귀신의 처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갖게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월절의 약속 중에는 다른 신에 대한 징벌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그 밤(유월절)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애굽기 12:12)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우상이 우상인 줄도 모르고 숭배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사도 요한은 귀신의 처소인 큰 성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을 들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교회는 오늘날 유일하게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사도들이 본보인 새언약의 절기를 지키는 교회입니다. 세상은 많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지만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새언약 생명의 진리로 세우신 진리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 오셔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하늘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으세요-

성령과 신부 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받으라! (어머니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교회)


어머니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교회


       생명수를 받으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물은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체는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의 1~2%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며 12%가 부족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을 두고 생명 그 자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우리 영혼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영혼의 생명인 영생도 생명수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없다면 우리 영혼도 심한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생명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아모스 8:11~13)

우리 영혼에 필요한 생명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진리인 생명수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어 영혼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생명수는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생명수를 주시는 주체가 누구인지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요한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섬이라는 곳에서 계시를 받았다. 천사가 모여준 미래에 대한 일들 속에서 그는 성령과 신부가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성령과 신부는 누구일까. 성령은 성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다. 생명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이 시대 성령께서 오셔서 생명수를 주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7~8)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 옆에서 함께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는 어떤 존재일까. 생명수를 베푸시는 주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생명수를 받을 수 없기에 ‘신부’에 대한 문제만큼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도 요한도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요한은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낡은 성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인 예루살렘은 누구인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그렇다. 생명수를 주시는 성령과 신부는 곧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시다. 성령 혼자만이 아닌 성령과 신부께서 함께 생명수를 주신다는 것은 이 시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수를 받기 위해 하늘 아버지와 더불어 하늘 어머니를 믿어야 함을 뜻한다. 이와 함께 구약성경에 많은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인 하늘 어머니께서 생명수를 주실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스가랴 14:8)

실지로 어떤 건물에서 물이 솟아난다면 큰 문제다. 아마도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스가랴 선지자는 생명수가 예루살렘성에서 솟아나 동서로 흐를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다. 이는 실지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생명수가 사시사철 쉼없이 흘러 넘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수는 더욱 그 양이 많아져 동서뿐 아니라 전 세계로 흐를 것을 에스겔 선지자도 예언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1~5)

처음에는 발목에 오르던 생명수가 멀리 흘러갈수록 무릎, 허리까지 차 올라 나중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이는 생명수인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됐지만 마침내는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점점 더 왕성하게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 시발점이 바로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생명수라야 전 세계로 흘러간다. 세상의 다른 유명한 신학자나 성경 연구가가 아닌 오직 하늘 어머니라야 가능한 예언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12)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흘러 넘친 생명수는 결국 강이 되고 그 강 좌우에는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시대를 뛰어넘어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1~5)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곳은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다. 많은 선지자들이 생명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난다고 예언하는 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예언도 성령과 신부께서 생명수를 주시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어린양의 보좌’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예레미야 3:17)

하나님의 보좌는 곧 예루살렘이다. 어린양의 보좌도 마찬가지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루살렘’이며 이는 서두에 기록한 ‘성령과 신부’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뜻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는 생명강이 예루살렘에서 흘러 넘치는 모습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기록한 요한의 계시와 같다.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생명수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받은 자들만이 하늘나라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함을 요한은 보았다. 누구라도 생명수를 받지 못한다면 영생도, 구원도, 천국도, 천국의 영광과 축복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심한 갈증을 느끼는 이 시대 하늘 어머니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말씀하고 계신다.
“오라! 누구든지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2013년 7월 21일 일요일

천사보다 낮은 모습 으로 이땅에 오신 그리스도(하나님의교회,그리스도 안상홍님)


                 천사보다 낮은 모습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세계 열방 중에 뛰어나게 해 줄 것이라 예언된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려왔다. 그러나 2천년 전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조상 대대로 수천년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배워왔던 유대인들이 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성경 예언대로 나타난 그리스도는 그들이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본래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하나님이다.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브리서 1: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잠깐 동안 천사보다 낮은 모습으로 임하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9)

천사보다 낮은 모습은 바로 사람의 모습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유대인들은 천사보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실 때도 당연히 천사보다 높은 영광의 모습으로 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의 모습, 즉 오히려 천사보다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셨다.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정관념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가복음 6:3)

그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오직 성경의 예언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본 자들은 비록 천사보다 낮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그 속에 감추어진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올바로 알아보고 영접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14)

그런데 2천년 전 오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두 번째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예언은 첫 번째 오실 때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예언이다. 즉, 첫 번째와 같은 모습인 천사보다 낮은 모습, 사람의 모습으로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 이스라엘 독립의 해인 1948년에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셔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수많은 사람들도 2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천사보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고정관념 속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2천년 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고정관념과 달리 천사보다 낮은 모습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깨닫고 구원에 이르기 위한 전제 조건이 바로 사람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다.

이 시대 구원자이신 성령과 신부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특별한 은혜는 2천년 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자기 생각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다.
(우리 구원을 위해 이땅에 다신 오신 재림그리스도를 우리는 반드시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우리 구원을 위해 친히 이땅에 두번째 오신 재림 그리스도 안상홍님 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새언약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의 예언따라
마지막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

영혼은 불멸의 존재인가

영혼은 불멸의 존재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종파가 넓은 의미의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다.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영혼에 대한 고찰은 오랜 세월 있어왔다. 이들은 영혼불멸을 여러 학설로 정립한 후 종교와 접목시켰다. 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중세시대 철학자나 종교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주장일 뿐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영혼에 대한 성경적 견해와 영혼불멸설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영혼불멸설

① 근거

헬라(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 사상을 이어받아 영육이원론을 체계화했다. 소크라테스는 이집트 여행 후 영혼불멸 사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사람들은 시체를 미라 상태로 보존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가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라고 한다. 즉, 영혼불멸 사상이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육이원론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돼 있으며 육체의 죽음 이후 영혼은 지속된다는 이론이다. 영혼불멸은 영육이원론을 바탕으로 영혼이 사멸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데 핵심이 있다. 이러한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적 단어인 ‘영생’이 영혼불멸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한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또한 영생이다. 그러니 영혼은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기독교대사전(대한기독교서회)에서는 플라톤의 영육이원론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의 영혼은 사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갈 것이며, 신들과 더불어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하던 사람의 영혼은 묘지를 왕래하는 귀신이 되어 이리나 독수리와 같은 신체 속에 들어갈 것이다. 참다운 철학자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 선한 영혼은 천국에, 악한 영혼은 지옥에 그리고 중간적인 영혼은 연옥에 간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상은 1세기경 유대인 철학자인 필론에 의해 유대교에 도입된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오리게네스가 신플라톤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영혼이 불멸임을 주장했다. 터툴리아누스는 “영혼불멸과 함께 악인의 영혼은 지옥 불에서 영원히 탄다”는 영원지옥설을 최초로 주장했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이 교회 내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됐으며, 13세기 스콜라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카톨릭교회의 교리로 집대성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테의 ‘신곡(神曲)이라는 작품은 영혼불멸설에 입각한 지옥과 연옥, 천국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성경에도 없던 이교철학사상인 영혼불멸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제5차 라텐란회의에서 영혼불멸을 반대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② 교단
 영혼불멸설은 천주교를 비롯해 모든 기독교의 핵심 교리다. 그러기에 기독교에서는 영혼불멸설을 부인하는 교단을 이단이라고 말한다.

③ 결론
 영혼불멸설은 이교의 철학사상을 유입한 것이다. 1517년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의 신학자인 칼뱅은 영혼불멸을 반대했다. 이에 앞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인 위클리프, 루터 등이 이미 중세교회의 영혼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지적했다.

언어학자이자 종교개혁자였던 윌리엄 틴들은 ‘토마스 모어경의 대화에 보내는 답변’이라는 저서의 제4권 2장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다. ···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 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성경적 견해
① 근거

성경에서는 영혼불멸이 아닌 영혼소멸을 말하고 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4)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0:13~14)

성경은 범죄한 영혼의 죽음과 그 영혼의 죽음을 뜻하는 둘째 사망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도록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다.

② 교단

영혼불멸설을 부인하는 교단으로는 여호와의증인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여호와의증인이 믿고 있는 영혼소멸은 육체가 죽으면 즉시 영혼도 함께 소멸함을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다(요한계시록 20:13~14). 안식교는 영혼소멸이 아닌 ‘영혼수면설’을 주장하고 있다. 즉 영혼은 소멸되는 것이 아닌 수면상태(잠든다)에 접어든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혼불멸설에 더 가깝다 하겠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영혼의 존재를 믿고 범죄한 영혼의 소멸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르는 교단은 하나님의교회밖에는 없다.

③ 결론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끝이 다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시작은 비슷하지만 끝에 가서 다르다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영혼불멸설이야말로 ‘이단’에 속한다. 영혼불멸설의 근간이 되고 있는 ‘육체를 떠나 영혼이 존재함’은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영혼이 불멸하며 영원하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성경은 분명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고 알려주고 있다.

2013년 7월 19일 금요일

오류...{카톨릭의 장미 꽃다발} [참진리를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카톨릭의 장미 꽃다발




"성모님께 묵주의 기도를 매일 정성스럽게
 바치라."

교황 비오 10세의 유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묵주의 기도는 장미 꽃다발을 의미한다. 가톨릭 교인들은 교회 기도문인 성모송을 읊을 때 묵주알을 돌리면서 횟수를 세게 되는데, 성모송을 한 번 읊을 때마다 성모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장미 10송이의 꽃다발을 성모에게 바치고 싶다면 성모송 10번으로 구성된 묵주의 기도 한 단을 읊어야 한다(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원동 성당 홈페이지 참조).



가톨릭의 묵주와 장미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묵주는 라틴어로 로사리움(Rosarium). '장미밭'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이 알고 있는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 꽃다발' 혹은 '장미 화환'을 뜻한다. 이것이 가톨릭이 묵주의 기도를 '장미 꽃다발 기도'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물론 이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가톨릭조차도 이런 관습이 이교도에서 유입되었다고 설명한다. 이교도인들에게는 자신을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쓰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천주교 서원동 성당 홈페이지). 이런 관습들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부패한 기독교는 더 많은 교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비성경적인 관습조차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순교자의 장미관'도 이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은 "순교 때 머리에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썼다. 이는 하느님을 뵙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예모(禮帽)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밤중에 몰래 순교자들이 썼던 장미관을 한데 모아 놓고, 그 꽃송이마다 기도를 한 가지씩 올리곤 했다"고 주장한다. 장미를 한 송이 한 송이 세며 기도했던 모습을, 묵주알을 하나 하나 세며 기도하는 모습과 연관짓고 싶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묵주가 이교도에서 유입되었다는 근거는, 여러 종교에서 묵주와 같은 형태의 도구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힌두교의 '자파말라(japamala)’는 가톨릭의 묵주와 불교의 염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자파말라'란 염송(念誦)의 고리로, '자파'는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며 '말라'는 고리(輪)를 뜻한다(운문사 홈페이지).

문제는 로마인들이 자파말라의 중간음 파(pa)를 길게 이해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로 인식한 데 있다. 즉 '자파-'는 산스크리트어로 장미를 뜻하기 때문에 '자파-말라'는 '장미의 고리'로 해석된다. 라틴어로 '로사리움(rosarium)', 포르투갈어로 '로사리오(rosario)', 영어로 '로사리(rosary)'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줄 모르고, 어떤 백과사전에는 로사리오(묵주)의 구슬은 보통 장미나무를 재료로 한다고 등재돼 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묵주를 장미나무를 재료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구슬의 재료는 나무, 유리, 수정 등이고 사슬은 은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슬람에서는 '미스바하' 혹은 '타스비흐'라고 불리는 도구를, 그리스정교회에서는 '콤보로이'라고 불리는 도구를 사용하며, 바하이교(19세기 페르시아인인 바하올라가 창시한 종교로 하느님을 믿으며 국내에도 소수의 신자 보유함)와 시크교에서도 가톨릭의 묵주와 유사한 형태의 도구를 사용한다. 이처럼 가톨릭의 묵주는 교회 내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성경의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고대 종교에서 비롯된 관습이 다양한 종교로 퍼졌으며 가톨릭의 묵주는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10월).

이처럼 가톨릭의 묵주는 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교황들에 의해서 강조되어왔다. 교황 비오 5세는 10월 7일을 '거룩한 묵주 기도의 모후' 축일로 제정하였으며, 교황 레오 13세는 10월을 '로사리오의 달'로 선포하였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묵주 기도는 매일 다시 살아남을 만끽한 기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심오한 방법"이라며 "온 정성을 다해 묵주 기도를 바치면 주님과 성모님께서 평화와 화해를 주신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가톨릭의 묵주 기도는 그들이 섬기는 성모 마리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실제로 묵주 기도 방법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묵주 기도는 묵주알을 세며 기도문을 읊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기도문이 여러 가지고 순서가 정해져 있어 관련 책자를 보며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십자가상을 잡고 성호경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도신경을 읊고 난 다음은 큰 구슬을 잡고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을 하고 세 개의 작은 구슬을 넘기면 성모송을 3번, 큰 구슬을 잡고 영광송과 구원을 비는 기도를 하고 신비(기도문 중 하나) 중 하나를 선택해 한 주제를 묵상하고 주기도문을 하고, 다음 열 개의 작은 구슬을 하나씩 넘기면서 성모송을 열 번 읊으는 식이다. 기도를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의 행적과 관련된 묵상을 하도록 하며, 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위키백과, 두산백과).

가톨릭 교인들은 이처럼, 묵주 기도를 통해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 때 큰 축복을 받는다고 이해한다.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이 묵주 기도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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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하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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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일한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카톨릭의 이방숭배사상에서 부터 시작된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 예배와 태양신 탄신일인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과 사도들이 본보인 안식일과 유월절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유일하게 지키는 교회입니다.


일요일 예배의 뿌리를 찾아 -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는 어디에? 하나님의교회 ?

일요일 예배뿌리를 찾아


로마 카톨릭(천주교)의 일요일 예배는 공식적으로 321년에 시작됐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일요일 예배를 지키지 않았다. 성경에 일요일 예배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요일 예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요일 예배의 근원은 기원전 539년 세워진 페르시아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르시아인들은 원래 ‘불’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 이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접하게 되면서 이곳의 여러 자연신들까지 숭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이후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 그리스식 발음)에 의해 신학과 우주관을 갖춘 종교로 재조직됐다. 바로 ‘조로아스터교’다. 흔히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해서 배화교(拜火敎)라고 부른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아후라 마즈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 초기 전파 과정에서 여러 남신과 여신 등을 믿는 고대 토착 종교와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의 신으로 꼽는 동시에, 그의 분신인 전쟁의 신이자 어둠을 몰아내는 ‘태양신’인 미트라를 열렬히 경배했다. 불에 대한 숭배가 태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예배의식에도 잘 나타난다. 이들에게 태양과 불은 예식을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신자들은 불이 타오르는 제단 앞에서 동물이나 나무 막대기 헌주 등의 제물을 태워 바친다. 이때 생기는 불꽃과 냄새로 경배를 표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조로아스터교인들은 가정에 화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화로 앞에서 제사뿐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며 매일 기도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상은 불이 아닌 태양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이 종교를 국교로 삼았던 사산 왕조의 금속주화 뒷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일요일을 태양신을 경배하는 성일로 간주했다. 일요일은 한 주간의 첫날로, 고대 바벨로니아인들이 숭배하던 태양을 비롯해 다섯 개의 별을 따라 한 주간의 각 날들에 명칭을 붙여 사용했는데, 일요일은 ‘태양(sun)의 날’에 해당했다. 이들에게 태양의 날,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미트라에 대한 경배는 페르시아를 넘어 그리스, 로마 제국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미트라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로마 군인들에게 전쟁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1세기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글이다.

"미트라(메흐르)교를 받아들인 첫 번째 사람들은 시실리해 인근에 살던 해적과 도둑떼였다. 이후에 이 해적들을 소탕한 로마 군인들이 미트라교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로마제국 전역으로 미트라교를 전파했다. 이들 외에도 시리아 상인들과 군인들도 이 종교를 받아들인 그룹 중에 하나이다."

1세기경 로마 군인들이 믿기 시작한 미트라교는 이후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될 정도로 그 세가 커졌다. 로마제국 전역에 미트라교의 신전인 미트라에움이 세워졌다. 특히 로마를 비롯해 누미디아, 달마티아, 브리타니아, 라인강 유역, 도나우강 유역에서 상당수 분포되었다. 급기야 미트라는 폼페이우스 황제(BC 106~48)의 동정(東征) 이후 로마제국의 수호신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숭배했던 미트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그 자리를 빼앗기는 듯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신으로 믿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해주었다.

표면적으로 기독교는 미트라교와의 경쟁에서 이긴 듯 보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와 반대였다. 유일신 하나님만을 믿으며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세속화였다. 미트라교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을 유입시키기 위해서 기독교는 잡다한 이방종교의 절기와 의식을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타의에 의해서였으나 나중에는 자의로 기독교를 변질시켜갔다. 가장 먼저 세속화된 건 예배일이었다. 321년 하나님의 주간절기인 일곱째 날 안식일이 사라지고 일요일 예배가 도입됐다.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는 예배일, 일요일 예배가 기독교로 들어온 것이다.

321년 콘스탄틴이 일주간의 첫날을 휴일로 정했을 때 그는 그날을 “태양의 숭배일(Sunday)”이라고 명명했다. 결국 이방의 상징들이 없어졌을 때 그 불멸의 태양은 최후의 것이 되었다. (교회사 핸드북, 송광택 역, 생명의말씀사)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에 쉬어야 한다. 그러나 시골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종 이날은 씨를 뿌리고 추수하기에 가장 알맞은 날이기 때문이다. 주후 321년 3월 7일 (콘스탄티누스의 칙령,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어떤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세례받기를 보류했으며, 미트라교의 대제사장의 칭호를 유지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절기인 안식일 대신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사 핸드북의 기록처럼 그가 최후까지 남기를 바랬던 신은 하나님이 아닌 ‘불멸의 태양신’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아닌 미트라신을 숭배하는 일요일 예배를 교회로 끌어들여왔다. 그리고 일요일 예배 유입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절기가 아닌, 태양신 미트라와 연관된 다양한 절기와 의식들로 교회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교묘하게 미트라교에 의해 잠식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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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예배가 아닌 성경 가르침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안식일을 일곱째날 토요일날 지키는
교회입니다.  첫단추를 잘 껴야 다음 단추도 잘 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일을 올바로 알고 지켜야 구원에 이를수 있는 올바른 신앙을 걸어갈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일을 버리고 이방 숭배일 이었던 일요일을 예배를 지키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수 없습니다.
구원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날에 예배를 드렸을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수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오셔서 안식이을 바로 지켜 올바른 신앙의 첫걸음을 시작하십시요~



2013년 7월 5일 금요일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GOD BLESS YOU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교회"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엘리베이터 안에 함께 있는 사원과 사장님과의 거리 42.195km,
화장실에서 소변 보던 신참과 선임병과의 거리 2000m,
함께 회의하는 팀원과의 거리 1000m,
한 소파에 앉은 아빠와의 거리 400m,
짝꿍인 친구와의 거리 110m,
TV 앞에서 함께 응원하는 가족과 지인과의 거리 0m.



던올림픽이 한창이던 지난해, 모 기업의 이미지 광고다. 이 거리는 실질적인 거리가 아니다. 심적인 거리다. 실제로는 가까이에 있지만 심적인 거리는 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멀기만 하다. 다만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할 때만큼은 심적 거리가 0m가 된다. 한 가지를 목표로 하나의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마라톤 거리에 해당하는 42.195km인가, 아니면 한 몸과 같은 0m인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소망하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0m의 거리를 원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0m로 좁힐 수 있을까.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사도행전 13:21~22)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과 다윗의 마음이 합해졌다면 그 거리는 0m일 것이다. 어떻게 한낱 사람인 다윗은 신 중에 신이신 하나님과 마음을 합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열왕기상 2:1~3)

다윗이 하나님과 마음을 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켰기’ 때문이다.

반면, 다윗과 같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합한 자였으나 나중에는 42.195km 이상의 거리로 멀어진 자도 있다. 사울이다. 사울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사무엘상 15:20~23).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 다윗은 그것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하나님과 합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그것을 잊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일요일 예배, 크리스마스, 십자가 숭배는,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잊어 생긴 결과물이다. 하나님과 합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증거를 믿고 지킨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0m로 좁힐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의규례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하나님의규례를 잘 지키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믿음대로 보이시는 하나님

믿음대로 보이시는 하나님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음이 제각각 달랐다. 단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음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번은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와 함께 있었는데 어찌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나"고 말씀하셨다. 빌립은 예수님이 일반인보다는 뛰어난 선지자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옆에서 늘 함께하신 그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께 동일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 달랐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측면에서 바라보았고, 도마는 부활 소식을 접하고도 의심하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고서는 그제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바라보지 못한 채 육신의 모습만 바라보다가 결국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천차만별이었던 이유는 '믿음의 차이'에 있었다. 흐려진 안경으로는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앞을 잘 보려면 안경을 닦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흐려진 시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 앞에 계셔도 알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반밖에 못 깨닫느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반밖에 못 볼 것이고, 온전히 깨닫는 사람은 온전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믿음이 100퍼센트 일 때는 100퍼센트 모습의 하나님으로, 50퍼센트일 때는 50퍼센트의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그만큼만 보여주신다.

실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을 때 그들에게는 당신의 본래의 모습까지도 보여주셨다(마17:1~8). 그러나 가룟 유다는 결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면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날이 성령시대 임을 증거하며
성령시대 구원자를 알려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