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2일 목요일

오벨리스크 태양을 훔치다.....




 

 오벨리스크  

태양을 훔치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터키 그리고 이스라엘. 이곳에는 사각 기둥 모양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이집트의 신전을 지키고 있어야 할 것이 왜 낯선 이국땅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이국땅의 상징물인 양 말이다.
 이집트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처음으로 옮긴 사람은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다. 그것은 엄연한 약탈이었지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상황에서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로마 황제가 이집트 파라오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라(Ra)의 신전을 지키던 오벨리스크를 굳이 로마까지 가져와 해시계의 중심 기둥으로 삼았고 이후 황제들도 조직적으로 오벨리스크를 로마로 가져갔다. 그들은 전차 경주장이나 신전 앞 광장을 이것들로 장식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4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잡으면서 오벨리스크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들의 손에 이끌려 부활됐다. 로마 교황들이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의 상징이자 로마 황제의 권위를 상징했던 오벨리스크를 교회 앞 광장에 세웠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십자가와 성광을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붙인 채 말이다.

이로 인해 오벨리스크에 대한 관심은 서방 열강들로 확대됐다. 약탈한 오벨리스크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명예와 부를 함께 손아귀에 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이런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일부 서방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서구열강은 왜 이 비석에 집착했는가? 그것은 식민지 쟁탈에서 성공했다는 자국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한 동기에서였다. 그리고 태양신의 상징물인 만큼 승리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서구선교 역사에 3G시대가 있었다. 정복자의 영광(Glory), 식민지에서 수탈한 황금(Gold), 그리고 하나님(God)을 한 그릇에 담고자 했다. (2005년 4월 20일자 국민일보, ‘오벨리스크의 눈물’ 제하의 기사)

오벨리스크가 없는 메트로폴리탄 주민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로마에 오벨리스크가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도 있었다. 파리는 이미 하나 가졌고 런던도 최근에 하나 가졌다. 만약 뉴욕에 오벨리스크가 없다면 다른 모든 큰 도시들은 뉴욕을 우습게 볼 것이다. 그들은 뉴욕이 오벨리스크를 가질 때까지 결코 당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떠들어댈 것이다. (1881년자 뉴욕 헤럴드, 이집트 이스마일 총독이 미국에 오벨리스크를 선물하기 전)



현재 오벨리스크는 로마에 13개를 포함하여 이탈리아에 무려 16개가 있으며 영국에 3개, 프랑스에 2개 그리고 터키와 미국, 이스라엘에 각 1개씩 있다. 이집트에 남아 있는 수(6개)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특히 오벨리스크의 약탈을 주도했던 장본인인 만큼 로마의 비율이 두드러진다. 대부분 로마 가톨릭 성당 앞에서 세워진 것들이다.

가톨릭은 오벨리스크가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한다고 얘기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굳이 사라진(?) 종교의 유물을 세우면서까지 그 승리를 자축했어야 했을까. 이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겠다는 가톨릭의 이념과도 맞지 않는다. 더욱이 성경에서 오벨리스크는 깨뜨려 없애야만 하는 우상이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승리란 우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다.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 위에 뿌리고 (역대하 34:4)

그가 또 애굽(이집트) 땅 벧세메스의 주상(柱狀)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집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예레미야 43:13)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께서 추구했던 승리의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십자가와 성광을 오벨리스크 위에 세움으로써 그들의 행위를 합리화시켰다. 과연 오벨리스크는 그들의 말처럼 십자가와 성광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이었을까.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태양신 신앙을 상징하는 사각뿔 형태의 석상 ‘벤벤석’에서 유래됐다. 이집트 신화에서 벤벤은 태초의 물 누(Nu)에서 솟아오른 언덕이다. 이 위에 태양신(아침: 케프리, 낮: 라, 저녁: 아툼)이 내려와 앉았다고 해서 벤벤과 태양신을 동격으로 여겼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 형태를 본떠 만든 벤벤석을 태초의 태양빛이 가장 먼저 닿은 장소, 성스러운 바위로 믿었다. 이후 태양광선처럼 길쭉한 사각형 기둥이 더해져 오늘날의 오벨리스크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집트 후기 왕조에 이르러 벤벤석 신화는 오시리스의 남근 신화와 합쳐졌다. 태양신은 파라오를 보호하고 왕권을 상징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태양신에 대한 숭배의식은 이처럼 더욱 강화되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태양신 숭배물이다. 그것은 태양신의 구현을 염원하는 자들의 가장 극적인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태양신 상징물을 굴복시키겠다고 덧붙인 십자가와 성광은 무엇일까. 태양신을 타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십자가와 성광 역시 타파해야 할 우상에 불과하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되기 전부터 태양신의 상징이었으며 방사형으로 빛을 내뿜는 태양 형상의 성광(聖光) 역시 그 자체로 태양을 의미한다. 결국 태양신 숭배물인 오벨리스크에 태양신 숭배물인 십자가와 성광을 장식한 꼴이다.

로마 가톨릭이 세운 오벨리스크, 그것은 결코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하지 않는다. 본래 이집트인들의 태양신 숭배물인 것처럼, 지금도 태양신 숭배물이다. 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바뀌어 버린 하나님과 목사의 위치..............-하나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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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교회
새언약 생명의 진리를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세상에 교회는 많지만 새언약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교회는 하나님의교회 뿐입니다.







바뀌어 버린 하나님과 목사의 위치






하나님과 목사의 위치가 바뀌었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됐단 말이다.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었고,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순서가 바뀌었다. 필자가 다녔던 기성교회 얘기다. 또한 작금의 교회 현실이 이러하여 답답한 심정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신자들의 최종 목적인 구원도, 영혼을 위한 교훈도 예수님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으뜸으로 여겨야 한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다녔던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었다, 목사였다. 목사는 믿음만을 강조했고 더불어 주일(일요일예배)을 강조했다. 그날(일요일예배)이 예수님의 날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날이라고 했다.


필자는 지금에 와서야 그 목사에게 묻고 싶다.
‘일요일예배를 지키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일요일예배의 주인이란 주장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강조한다. 일요일예배를 강조하는 목사의 말과 다르게 말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태복음 12:8, 누가복음 6:5)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는가.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수많은 교회들이 ‘주여 주여’ 하며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요일예배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혹 일요일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이해해주실 거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믿음만 있으면 날짜는 상관없다고 목사가 말했는가. 그렇다면 그 목사는 믿어서는 안 된다. 본인의 위치와 하나님의 위치를 심하게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인 되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이다.

혹 아직도 목사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의 위치와 바꿔치기 한 사람을 따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말을 더 강조하는 교회에서 구원을 기대하는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한낱 사람인 목사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목사의 위치가 바뀌었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됐단 말이다.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었고,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순서가 바뀌었다. 필자가 다녔던 기성교회 얘기다. 또한 작금의 교회 현실이 이러하여 답답한 심정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신자들의 최종 목적인 구원도, 영혼을 위한 교훈도 예수님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예수님을 으뜸으로 여겨야 한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다녔던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었다, 목사였다. 목사는 믿음만을 강조했고 더불어 주일(일요일예배)을 강조했다. 그날(일요일예배)이 예수님의 날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날이라고 했다.


필자는 지금에 와서야 그 목사에게 묻고 싶다.
‘일요일예배를 지키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일요일예배의 주인이란 주장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강조한다. 일요일예배를 강조하는 목사의 말과 다르게 말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태복음 12:8, 누가복음 6:5)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고 했는가.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수많은 교회들이 ‘주여 주여’ 하며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요일예배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혹 일요일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이해해주실 거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믿음만 있으면 날짜는 상관없다고 목사가 말했는가. 그렇다면 그 목사는 믿어서는 안 된다. 본인의 위치와 하나님의 위치를 심하게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인 되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이다.

혹 아직도 목사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의 위치와 바꿔치기 한 사람을 따르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말을 더 강조하는 교회에서 구원을 기대하는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한낱 사람인 목사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성경을 중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 로 초대합니다.

2013년 9월 11일 수요일

약점을 강점으로...

 


 

약점을 강점으로


바다의 최고 포식자 상어는,물고기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뜨고 가라앉는 것을 조절하는 공기주머니 즉 부레와,아가미 근육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어는 부레 대신 몸 전체에서 4분의 1을 차지하는 큰 간을 가지고 있는데,지방질로 이루어진 이 간이 물보다 가벼워 몸이 물에 뜨는 것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 물에 가라앉는 것을 막으려면 쉼 없이 몸을 움직여야만 합니다. 게다가 호흡에 필요한 아가미 근육이 없다 보니,온몸을 움직여 산소 흡수를 해야 하므로 잠시도 헤엄 치기를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상어가 부레와 아가미 근육이 없이도 바닷속 어디든 민첩하게 이동하고 먹이를 재빨리 사냥 할수 있는 것은,가라앉지 않고 호흡을 하기 위해 몸부림을 하느라 지느러미가 강하게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약점이,바다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있게 한강점이 된 셈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내게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들로 의기소침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내 영혼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영혼의 운동을 꾸준히 하고,기도로써 영혼의 호흡을 멈추지 않는다면 말이지요,내게 부족하고 약한 것이,영혼을 쉼 없이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힘입니다.

하나님의뜻 과 황제의 어명 어떤것이 중요한가? .하나님의교회

온세계가 주목하는 하나님의교회 오늘남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중 하나님의교회는 특별합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며 유월절로 시작 하여 하나님의절기를 모두 지킵니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따라 이 땅에 오신 어머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일의 교회입니다. 초대합니다. 하나님의교회로~

하나님의뜻 과 황제의 어명

어떤것이 중요한가?

 
 


나더러 주여 자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아무리 초보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십계명이 무엇인지 정도는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십계명 중 4번째 계명이 바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인데,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는 안식일에 해당하는 일곱째 날 토요일 대신에 첫째 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면서 심지어 매일 매일이 안식일이요 일요일이 일곱째 날이라는 억지주장과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2천 년 전 예수님과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사도들과 성도들은 갖은 박해와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로마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에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안식일을 성수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의 순수성을 유린당하지 않기 위해 험난한 산중 사막으로 피해 다니면서 그들의 숭고한 신앙심을 지켜왔다. 그러나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을 따르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안식일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일요일을 성수하며 로마 황제로부터 상당한 권력을 부여 받았다.

우리는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할까. 천국을 목표로 누가 뭐라고 하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황제의 어명에 굴복하여 일요일마다 주일성수 하느라고 헛된 수고를 계속할 것인가.

아직도 주일성수를 외치던 한 권력자의 망령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과 통합을 수없이 반복하는 줏대없는 교단과 대형교회의 위세에 눌려서 식물인간처럼 눈치신앙으로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미지근한 신앙이라면 차리라 오염된 교회를 떠나서 진리를 찾아나서는 가나안교인이 더 낫지 않을까.

이후에는 도대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2013년 9월 7일 토요일

왜 두번째 오실까????????????????????/하나님의교회

2000년 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언약 생명의 진리는 초대교회이후 안식일,유월절 외 모든 새언약 절기가 없어져 버렸습니니다. 새언약 없이는 구원도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다시한번 이땅에 육체로 오셔서 사라져 버린 새언약을 회복시켜 주실것을 성경은 예언합니다.그예언은 오늘날 실상이 되어 사라진 새언약은 그리스도 안상홍님으로   부터 회복되었습니다.하나님의교회 가 유일하게 새언약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 로 오셔서 생명의 진리   새언약을 알고 지키는 축복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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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두번째 오실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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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다. 인류는 왜 구원자가 필요한지 또 인류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이기에 구원자가 등장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기다리는 이 시대의 구원자는 과연 누구인지 알아보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이것이다. 바로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지구상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명이 있다. 굳이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주려고 하는 ‘생명’은 무엇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3)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수한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처럼 무익한 육신의 목숨이 아닌 영원히 사는 영혼의 생명, 즉 ‘영생’을 주고 싶어 하신 것이다. 유한한 삶을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인류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류는 왜 영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 해답은 창조의 역사가 수록된 창세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하나님께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 살게 하셨다. 모든 것을 다스리며 자유를 만끽하도록 하셨다. 단 하나, 바로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내렸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단언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뱀의 꼬임으로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결과는 인류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사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어도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22)

그 방법은 바로 생명과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라 할지라도 생명과를 먹는다면 영생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4)

그룹천사들과 화염검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에 손을 댈 수 없도록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켰다. 결국 생명과의 길은 막혔고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 지금까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의 굴레에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손댈 수 없었던 그 생명과를 가지고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에덴동산의 생명과라며 주신 것이 당신의 살과 피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살과 피는 에덴동산의 생명과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13:34~35)

창세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것은 무엇인가.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감추어버린 것. 바로 생명과다. 그런데 이것을 ‘비유’라고 하시며 실체는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꼭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떻게 먹고 마실 수 있을까.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 26~28)

인자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된다. 그러니 유월절은 에덴동산의 생명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인류는 구원 얻기 위해 유월절을 지켜야 하며 유월절을 지키는 것만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신 것이다(누가복음 22:15). 이 말씀 속에는 유월절만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인류에게 지키라고 예수님께서 전하여 주신 유월절이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폐지되고 말았다. 생명과의 진리인 유월절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인류에게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를 회복하기 위해 재림이라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28)

두 번째 나타나심, 즉 재림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처음부터 인류를 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며 단 한 번도 변치 않은 사랑이다. 그러기에 두 번째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재림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에덴동산의 생명과인 ‘유월절’을 회복해야만 한다.

‘왜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셔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토록 원했던 ‘생명과’를 우리에게 찾아주는 것. 그룹천사들과 화염검으로 막아놓았던 생명과로 가는 그 길을, 오직 하나님만이 열어주실 수 있는 그 길을, 유월절이라는 진리로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이 땅에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우리는 두번째 오신 재림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나.잃어버린 생명의 진리를 다시 오셔서 찾아주신 그리스도 안상   홍님은 성경이 증거하는 재림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의교회는 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세워주신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로 초대합니다.

2013년 9월 6일 금요일

"내 마음에 따라"------(하나님의교회)

 

생명수 주시는 성령과 신부께서

세워주신 하나님의교회 오늘날 성령시대 유일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



같은 글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받는 느낌이 다릅니다.누군가는 대강 흝고 마는 단어가 어떤
이들에게는 소중한 깨달음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종종 입장이 바뀔때도 있습니다.전에는 별다른 감흥 없이 보았던 글이 무한한 감동으로 다가오거나 한때 심금을 울렸던 문장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글은 항상 그대로 입니다. 달라지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은 꿀 섞은 과자 같던 만나는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주실 때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나 변함없는 맛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마음이 꿀맛 나던 양식을 박한 식물로 만들어버린 것뿐이지요(민21장4절)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기만 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혹 그렇고 그런 훈계처럼 느껴지시나요?그렇다면 내 마음이 처음과 달라졌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지나치고 흘려도 상관없는 글로 만들 것인지,영혼을 살찌우는 귀한
자양분으로 삼을 것인지,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초대합니다
하나님의교회로
성경을 통해서 생명의 진리를 꼭 확인하세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온누리에
하나님의교회

반쪽짜리 안식일-/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는요~재림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세워주신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는요~하늘어머니 께서 함께하시는 교회입니다.
새언약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교회

반쪽짜리 안식일


하나님의교회 외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유태인과 안식교 교인들이다. 이들은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고 있다. 일몰설에 의거한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교회는 안식일을 토요일 아침을 기점으로 지키고 있다.
이에 하나님의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은 ‘제대로 안식일을 지키겠다면 유태인들처럼 금요일 저녁부터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며 하나님의교회가 임의로 날짜를 바꾸어 안식일을 지킨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유태인들이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먼저, 일몰설이 과연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주장인지 보자. 일몰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창세기 1장을 근거로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그들의 주장대로면 하루의 시작은 저녁이고 끝은 아침이다. 저녁부터 아침까지가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또한 일몰설이 이에 근거한 것이라면 안식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아침까지만 지켜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성경적 근거와는 맞지 않게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고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근거로 레위기 24장을 제시한다.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레위기 23:32)

이를 근거로 안식일을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지킨다는 얘기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이 안식일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위기 23:23~32)

여기서 7월 1일을 안식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후 7월 8일이 안식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는가. 9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9일 저녁부터 10일 저녁까지 지키라고 한 안식일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절기에 안식할 것’을 ‘안식일을 지키라’고 표현한 것인데, 그들은 앞뒤 문맥도 살피지 않고 무조건 제칠일 안식일로 해석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 참고로 7월 1일은 나팔절이고 10일은 속죄일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23장을 근거로 제칠일 안식일을 주장하는 것은, 절기의 안식일과 제칠일 안식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펼치는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제칠일 안식일을 언제부터 지키라고 하셨을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1:31, 2:1~3)

하나님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라고 선포하셨다. 언제 선포하셨는가? 아침이다. 그러면 일곱째 날은 어느 시점부터 시작하겠는가. 이 역시 아침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이처럼 안식일은 일곱째 날 아침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된다는 일몰설은 성경 가르침과 결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일까. 율법을 꿰고 있다 자부하는 그들이 왜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느헤미야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매 장사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번 예루살렘성 밖에서 자므로 내가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저희가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 13:15~21)

구약의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인데, 느헤미야의 기록을 보면 안식일에 장사를 하고 있다. 이에 온전하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전날, 성문을 닫는 역사가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준비하는 습관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데, 문제는 이런 관습이 너무 과하여서 안식일을 예비하는 금요일 저녁마저 안식일로 생각해버린 데 있다. 안식일을 아예 지키지 않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안식일을 애써 지키면서도 사람의 생각이 덧붙여져 왜곡된 안식일을 만들어 지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킨다. 유태인과 같은 사람의 관습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유태인처럼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은 안식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주장에 불과하다.





2013년 8월 31일 토요일

새언약 ?? 초대교회 진리? 하나님의교회?!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와 교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땅에 세워주신 교회는 오직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는 오직 하나인데
어떻게 진리 교회를 찾을수 있을까요?


 
정답은 성경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사도들이 다닌교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사도들이 다녔던
초대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피로 사신 교회

이 지상에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는 하나!
 
행20장28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함은 친다 라는 뜻으로
양육하고 돌본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양육하시고 돌보시는 교회는 오직 피로사신교회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고전1장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귿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에 있는 무슨교회라 했습니까?
하나님의교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피로사신교회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교회 입니다.
 
그렇다면 이름만 하나님의교회라 해서 다 피로 사신교회는 아니지요
 
피로 사셨다는 말씀은 곳 하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교회에는 하나님께서 흘리신 하나님의피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피는 ?
 
출34장25절
너는 내 픠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두지 말찌며
 
하나님의희생  피는 바로 유월절 희생의피 입니다
 
마26장26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경은 신,구약 모두 하나님의 피로서 세워주신 진리는 유월절임을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교회중에서 하나님의 희생의피로 세우신 교회는 오직하난인데
그이름은 하나님의교회로 반드시 그 교회에서는 유월절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닫.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교회를 세우실때 당신의 희생의 피로로 세우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우리들이 구원을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1장7절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처럼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교회는 하나님의교회요 진리는 유월절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성경의 가장큰 비밀 _오직 위에 있는 ...자유자는 우리 어머니라-갈4/26절 (어머니 하나님?),하나님의교회

사랑의 우리 어머니....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

희생

사랑

생명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는      ......
어머니 가 아닐까요.........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십니다
자신의 삶 모두를 ......

만물속에 어머니의 희생,사랑,생명은 영의 어머니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 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될.. 성경의 가장 큰 비밀  어머님 하나님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장 26절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을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증거합니다.
 육의 어머니가 아닌 우리 영의 어머니가 계심을...
 
 
하나님의교회는 어머니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로 오셔서 성경을 통해서
어머니하나님을 깨닫는 축복 받으세요!
 
 

 



한분 아닌"우리라고 하신 하나님은 누구일까" -초대교회 이름 하나님의교회

love is....

한분 아닌 "우리"라고 하신 하나님은 누구일까?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하나님의교회는요~

하늘어머니 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넘치고 넘치는 하나님의교회로 오세요~

성경은 어머니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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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보다 해박한 성경지식이 있는 신학자나 목회자들도 알지 못하는 성경의 비밀이 있다. 바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우리’라는 단어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내 형상을 따라 내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했어야 온당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나’ 라는 단수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복수형태의 ‘우리’라고 표기하신 것일까?

 ‘우리’라는 것은 분명 2명 이상의 여러 사람을 일컫는 일인칭 대명사가 아닌가? 처음부터 완벽하신 하나님이 무엇인가 잘못 표기하신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창 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자, 우리가 내려가서 "
 
사 9: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즉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의 내용 뿐만 아니라 다른 내용에서도 하나님 당신을 표현하실 때 ‘나’ 또는 ‘내가’라는 표현이 아닌,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표현하신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위 내용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니 남자와 여자가 창조가 되었다. 즉 남자와 여자가 나오게 된 경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는 남성적 형상의 하나님과 여성적 형상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여성의 존재가 탄생하게 된 경위는 어머니하나님이 존재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하나님’이라는 남성으로서의 성별을 두신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표현하실 때에 아버지라는 대표성만을 우선적으로 알려주셨을 뿐, 어머니하나님은 창세의 역사부터 하나님의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자리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과 하와! 남성과 여성을 일상적으로 대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는 성경의 비밀 중의 비밀임을 알려 주시고 있다.


엡 5:30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남녀간에 만나는 것이 비밀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남녀간에 만나는 것이 비밀이라고 했을까?

골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더 이상 성경의 비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히 12장에서는 육체의 아버지를 통해서 영의 아버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고전 15장에서는 첫사람 아담 을 통해서 마지막 아담, 남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존재 함구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예언의 시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하나님에 대하여 성령과 신부로 증거하고 있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하나님의교회 유월절 지킴

생명의 진리 새언약 유월절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언약 유월절,하나님의교회 에서 지킴

 
오늘날 성령시대 재림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다시 찾아주신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교회 에서 지킴
 

 
세월은 흘렀지만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새언약 유월절은
초대교회에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일하게 지켰으며
오늘날 성령시대 에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일하게 지킴
 
 
 

그리스도 안상홍님 세워주신 하나님의교회{하나님의 나라가 임할때 까지}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는 성령시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 께서 세워주신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지만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교회를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그이유는 중세종교암흑세기 동안에 진리가 훼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교회는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새언약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로 오셔서 생명수 축복 받으세요 .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새언약진리를 찾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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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임할때 까지...



하나님의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은 누가복음 22장을 제시하며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누가복음 22:16~18)

그들은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이 땅에서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말인즉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서 유월절이 지켜져야 한다’는 해석이다.

언뜻 듣기에 그들의 주장처럼 새 언약 유월절을 이 땅에서 지켜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하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주장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새 언약 유월절이 어떤 절기인가? 죄 사함을 받는 절기다(마태복음 26:17~28). 그렇다면 그들은 죄인의 죄를 사함 받는 절기인 유월절을 죄인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천국에서 지키겠다는 얘기가 된다(요한계시록 14:5).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절기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조차 알지 못하니 천국에 가서 유월절을 지킨다, 그곳에서 죄 사함 받는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일까.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누가복음 21:29~31)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에서 싹이 날 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라고 비유로 알려주셨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명확히 알려주셨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태복음 24:32~33)

두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는 인자 곧 재림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 22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유월절을 지키겠다’는 말씀은 ‘재림 예수님께서 임하실 때 유월절을 지키겠다’는 의미다. 이는 재림 예수님만이 유월절을 세워주실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교회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유일하게 유월절을 세워주실 수 있는 분, 재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증거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뜻이다.

이같이 성경의 예언과 성취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여전히 유월절은 천국에서 지켜야 한다고 우기겠는가. 이 땅에서 죄 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천국 문 안쪽으로 발도 디밀 수 없는데 어쩌랴. 이제라도 깨달아 유월절을 세워주신 재림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아야 할 것이다.

새언약 진리를 허락해 주신 그리스도 안상홍님은 성경에 예언따라 이땅에 두번째 오신 재림그리스도 이십니다.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하나님의교회- 어머니 하나님

 
 
하나님의교회는 어머니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교회입니다.
세상에디 에도 없는 하늘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러 하나님의교회로 오세요
 
 

        어머니.....
        하늘어머니....
        하나님의교회 는 
        하늘어머니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하늘어머니의 사랑을 전하는 하나님의교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는 말씀 _하나님의교회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교회는 오늘날 유일하게 새언약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성령과 신부 께서 생명수 주시는 하나님의교회 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는 말씀

예수님께서는 장차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을 경고하셨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태복음 24:23~26)

이 말씀을 가지고 엉뚱하게도 재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고 말하여도 믿지 말아야 한다면 ‘그리스도가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다’고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또한 교회 중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는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뜻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무조건 배척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분명히 ‘거짓 그리스도’를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거짓 그리스도’가 아닌 ‘참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까?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로마서 11:26)

구원자는 시온에서 오신다고 하셨다. 구원자가 계신 시온은 어디인가?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이사야 33:20~22)

구원자가 계시는 시온은 절기 지키는 곳이다. 하나님의 절기는 주간절기 안식일을 비롯하여 연간절기로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의 7개 절기가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와 같은 절기를 지키는 곳이 바로 ‘시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않는 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거짓 그리스도’를 믿거나 ‘다른 예수(고린도후서 11:4)’를 믿는 곳이다. 성경은 생명수 주실 그리스도의 출현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생명수 주시는 성령과 신부는 오직 하나님의 절기 지키는 시온에서만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의 절기를 유일하게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날수 있습니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복음이란?[새언약 복음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오늘날 유일 하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지켜 행하는 교회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가르침을 그대로 지켜행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유일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새언약의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행하는 교회입니다. 새언약을 지키고 생명의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교회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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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복음이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복음을 전파하러 오셨다 하셨기에 복음을 모르고선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전파해주시고 지키는 본을 보여준 복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 받으신 때부터 시작이다.




 
눅16장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하신 것은 '침례 요한 이후부터'라는 말씀인데, 예수님 침례 받으시고 40일 금식하신 후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막1장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4장17절,23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홰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하시며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그 때부터 전파하기 시작하신 천국 복음은 십자가로 끝마친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으로 말씀하셨다.
 
24장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행하시고 가르치신 천국 복음을 어떻게 해야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선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실지 교훈으로서 행하신 규례는 다음과 같다.
 
1.침례(마3장13-17절)
2.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는 것(눅4장16절,마24장20절 비교)
3.초막절 때에 성전에 올라가사 전도하시는 것(요7장2절, 37절)
4.유월절 성만찬을 행하시며'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눅22장20절)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천국 복음이라고 하겠다.
 
혹은 말하기를 그 당시에는 예수님도 유대인이므로 모세 율법을 따라 안식일도 지키시고 초막절도 지키시고 유월절도 지키셨다고 주장하며 십자가 이후에는 모세 율법의 모든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키신 절기는 모세 율법의 절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3년 동안 실지 교훈으로 가르쳐 주신 새 언약의 절기인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이 십자가 후에는 필요없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3년 동안 너희에게 가르치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장19-20절)하셨고, 또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장15절)하신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신 천국 복음을 십자가 후에도 계속해서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전11장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11장23-26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전에 가르치신 복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복음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갈라디아 교회나 고린도 교회나 여러 교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실지 교훈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갈1장6-9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님이 행하시지 않은 복음은 다 다른 복음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은 지키셨는데 일요일 지키면 다른 복음이 될 것이요,
예수님은 초막절을 지키셨는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추수감사절을 지키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셨는데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지키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다.
 
고후11장4절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사도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진리가 아닌 다른 복음은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예수,다른 영, 다른 복음을 받았다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받거나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거듭거듭 말해 놓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심각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안식교의 채식주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채식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신앙 입니다.
음식문제 또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 있기에 이시대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귀를 귀울이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랬을때 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안식교의 채식주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이하 안식교)의 가장 큰 특징은 채식이다. 안식교는 식품회사인 삼육식품을 운영하며 두유와 고기 대용 식물성 단백식품을 생산하는 일에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에 채식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안식교 신도인 이상구 박사의 남다른 식사법이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난생처음 ‘채식’이라는 독특한 식사법을 접한 사람들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대던 잡식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해졌다. 비린내와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채식은 정갈하게 느껴지고 고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채식주의는 종교를 넘어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본능을 자극하며 이어져 왔다. 현재는 섭취 방식과 개인의 사상이 가미되어 다양한 형태로 정의돼 있다. 극단적 채식주의자로 분류되는 프루테리언(fruitarian)은 동물은 물론 식물의 생명도 존중하여 땅에 떨어진 열매만 먹는다. 그 다음으로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은 육류뿐 아니라 유제품과 달걀, 생선조차 먹지 않는다. 비건 다음으로 엄격한 채식을 하는 락토 베지테리언(lacto-vegetarian)는 유제품만 허용한다. 또, 유제품과 달걀만 허용하는 락토오보 베지테리언(lacto-ovo-vegetarian), 유제품과 달걀, 생선까지만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o-vegetarian), 가끔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유제품과 달걀, 생선, 닭고기는 먹되 돼지고기와 쇠고기 등 다른 육류는 먹지 않는 세미 베지테리언(semi-vegetarian) 등으로 분류된다.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이 야만적으로 비쳐지도록 도축 현장을 영상에 담아 채식을 선전하기도 한다. 채식주의자가 채식에 반기를 드는 경우도 있다. 유명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건강을 위해 수년 동안 채식을 해오다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느껴 결국 채식을 포기했다. 올초에는 20년간 철저하게 비건으로 살아온 채식주의자가 ‘채식의 배신’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채식주의의 폐해를 폭로한 바 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풀어야 할 문제는 건강, 동물 보호 등에 따른 채식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과연 육식을 금하고 있으며 채식을 권고하느냐는 것이다. 안식교의 채식주의는 성경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식교의 교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교는 음식에 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선정한 원래의 음식은 채소와 과일이었다(창세기 1:29). 하나님께서 음식물로써 부적합하다고 말씀하신 동물은 돼지와 같은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된 동물이다(신명기 14:8, 레위기 11:7~8). 즉 사슴, 양, 소처럼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만 먹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셨다. 다람쥐, 토끼, 돼지를 먹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물고기나 해산물 중에서도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는 먹어도 좋지만 뱀장어, 메기, 새우, 게, 굴, 조개 등은 부적당하다. 조류도 정결한 짐승으로서 먹도록 허락하신 것은 닭, 메추라기, 칠면조, 비둘기 등이다.”

안식교의 교리상에는 분명히 고기를 금한다는 내용이 없다. 구약의 율법을 근거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소, 양, 닭, 칠면조, 붕어, 조기 등은 먹어도 된다. 그런데 이것조차 금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교리를 변질시킨 모양새다.

생선과 고기를 구별해서 먹는 것이 그들의 교리다. 그런데 고기 자체를 금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식교는 왜 채식을 고집하는 것일까.

채식은 초기 안식교를 이끄는 데 주된 역할을 했던 엘렌 화이트가 주장한 건강법일 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생명이 긴 인류에게 동물성 음식을 먹도록 허락하시어 그들의 죄스러운 생애를 단축시키셨다”는 것이다. 안식교가 채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이유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는 야채만 먹던 시절의 사람들은 몇 백 년씩 장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대홍수 후, 고기를 먹기 시작했던 노아 역시 350년을 더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음식에 대해 어떤 교훈을 하고 있을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세기 1:29)

안식교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최초로 선정한 음식은 자생적으로 자라난 채소와 과일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한 이후에는 음식에 대한 규례가 바뀌었다. 토지를 갈아 수고해서 얻은 농산물을 먹게 하신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 (창세기 3:17~19)

노아 때, 대홍수 이후에는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셨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세기 9:3)

그리고 모세 때 와서는 음식을 구별해서 먹도록 율법으로 제정하셨다. 레위기 11장 전반에 걸쳐 기록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그것이다. 이 장을 살펴보면 안식교에서 말한 대로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음식물로는 부적합한 동물이 맞다. 그렇다면 이후 돼지와 같은 부정한 짐승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될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사도행전 15:28~29)

이제는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만 먹지 않으면 된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세운 율법을 폐하시고 완전한 율법을 세워주셨다. 이스라엘 민족들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주셨다(에베소서 2:11~17). 전에는 가증하게 여기던 이방인과 부정한 음식까지 모두 깨끗게 하셨다(사도행전 10:9~16)

사도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간에 이 문제를 놓고 딴소리를 하거나 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각 교회에 편지를 쓸 때마다 이에 대해 강조하고는 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서 2:16)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로마서 14:20)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디모데전서 4:3~5)

음식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께서 잡수시고 사도들이 먹고 가르친 대로 따르면 된다. 하나님께서 채식을 하라고 하실 때는 채식을 하고, 육식을 하라고 하실 때는 육식을 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은 마땅히,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한다.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돌고래의 모정*어머니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하나님의교회

(우리 어머니 ... 성경은 하늘아버지와 하늘어머니 께서 이땅에 친히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수를 허락해 주심을 예언합니다. 성경예언따라 이땅에 오신 하늘아버지와 하늘어머니를 영접하는 축복 받으세요 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 지는 유일한 교회)


돌고래의 모정(母情) ‘감동’


지난해 한 관광객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린 동영상이 큰 화제가 됐었다. 동영상 제목은 ‘아기 돌고래야 집에 데려다 줄게”다. 영상 속 어미 돌고래는 새끼 돌고래를 등지느러미 위에 업고 헤엄쳤다. 새끼 돌고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에 깊은 상처들이 나 있고 혈흔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이미 죽은 것이다.


파도에 새끼 돌고래의 사체가 휩쓸려갔지만 어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새끼를 찾아 등지느러미에 업고 계속 헤엄을 쳤다. 이런 모습은 3일 동안 관광객들에게 포착됐다고 한다. 많은 네티즌들이 이들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죽은 새끼 업은 돌고래, 마음이 뭉클하다”, “죽은 새끼를 업은 어미 돌고래의 모습이 마치 사람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죽은 자식조차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어미의 마음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낱 미물에게도 한없는 모정을 주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신성에는 한없는 모정을 지니신 어머니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다. 만물이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니 그 누구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핑계를 대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하늘에 계신 어머니 하나님을 증거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바울의 증언처럼, 우리에게는 아버지 하나님뿐만 아니라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어머니 하나님’께서 계신다. 어머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죽어가는 당신의 자녀(로마서 6:23)를 품에 안아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다. 지금 이 항해에 함께하자. 어머니께서 부르신다.
 



천국을 상속하라 .. 하나님의교회-어머니 하나님

[ 어머니 하나님 ] {하나님의교회}오늘날 유일하게 하늘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하나님의교회]성경은 어머니 하나님께서 성령시대 우리 구원을 위해 이땅에 친히 임하심을 예언합니다.성경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교회 에서 생명수 축복 받으세요


       천국을 상속하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지구상에서 인간이 살았던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시를 꼽으라 한다면 지금의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지역에 있는 하란이다. 3500년 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이주해 온 인물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그 주인공이다.

하란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후에 모든 유대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조상이 된다. 그의 기록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태어난 곳부터 아내 사라와 함께 가나안으로 이주하며 겪는 모든 일들과 그가 낳은 자녀까지.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많은 성경의 지면을 할애하며 아브라함 가정의 역사를 기록하셨을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 말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누가복음 16:19~24)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비유다. 특이한 점은 나사로가 죽어서 간 곳이다.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표상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아브라함 가정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 두셨던 것이다. 즉 아브라함 가정의 역사는 단순히 한 개인의 가정사가 아닌 천국을 소망하는 신앙인들을 위한 표본이며 길잡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가정사 중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자손이 누구이며, 가업은 무엇이고, 이를 물려받은 자녀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이처럼 아브라함 가정의 역사 중 우리가 중점을 두고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가 바로 ‘상속자’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유업을 물려받은 후사에 대한 자격 조건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을 천국 후사에 대한 자격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과연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물려받은 후사는 누구였는지 알아보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75세가 넘었다. 아브라함은 상속자를 세움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결정을 의뢰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창세기 15:2~3)

이때까지도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다. 그의 아내 사라가 이미 70세가 넘어 자식을 가질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다메섹이라는 지역에서 입양해온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4~5)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은 후사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일러주셨다. 아브라함은 고민했다. 사라도 이 일에 대해 많은 갈등을 느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꼭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은 자녀가 후사가 돼야 했다. 결국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세기 16:1~2)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8)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혈육이 탄생했다. 노년에 얻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의 탄생을 고하고 상속자로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길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세기 17:19)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되리라”는 하나님 말씀은 아브라함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몸을 통해 난 자라야 상속자로서의 자격이 부여된다고 하셨다. 사라는 90세였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켰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창세기 21:1~3)

비로소 아브라함 가정에 유업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탄생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된다’는 하나님의 뜻은 사라를 통해 이뤄졌다. 이는 아브라함 가정의 상속자는 사라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뜻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장자상속제도가 있었다.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후사가 결정됐다면 단연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후사로 결정된 것은 유업의 절대적인 조건이 바로 ‘어머니’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지 못하고 쫓겨났으며 사라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삭이 상속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가정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뜻은 무엇일까.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이 말씀 중 ‘우리’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고자 하는 자들은 어머니의 자녀가 돼야 함을 바울은 기록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 4:28~30)

이삭이 누구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았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되고 싶다면, 또 천국을 유업으로 받고 싶다면 과연 누가 필요한지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31)

‘자유하는 여자’는 곧 ‘우리 어머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어머니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과연 어머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기성교단은 이스마엘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삭이 어머니 사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어받은 것같이 우리도 하늘 어머니를 믿어야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가정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다.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왜? 십자가를 세우는가!

 

도시에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

왜 ? 교회에 십자가를 세울까??

오히려 성경에서는 우상을 세우지 말라 하셨는데.... 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왜 세우는가?!



십자가는 우상이다

왜 이렇게 많은 십자가가 존재하는 것일까. 카톨릭 백과사전은 40가지 모양의 십자가를 소개하는 데만 한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만약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유래됐고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모양의 십자가들, 이들 가운데 머나먼 고대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은 십자가는 하나도 없다. 신약성경 용어주석사전에 의하면 “십자가는 고대 갈데아에서 기원되었고 그 나라와 이집트를 포함한 인접 국가에서 담무스(Tammuz) 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의 기념비들과 신전 벽돌에서 타우 십자가(T)를 들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저명한 역사가는 수천 년 동안 바꾸지 않는 여기(이집트)에서 우리는 가장 신성한 상형문자들 가운데서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를 보게 된다. 그러나 특히 ‘이집트의 십자가’ 혹은 타우(T) 십자가로 알려진 것은 자주 원이나 타원이 위에 그려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신비적인 상징이 이 나라에서는 유별난 것이 아니었으니 갈대아인, 페니키아인, 멕시코인이나 두 반구(半球)에 살고 있는 모든 고대인들이 경배했다고 밝혔다 (로마카톨릭주의의 정체, 92쪽).

 
이처럼 십자가는 여러 민족들에게 유포되어 신성시 되었다.
중국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오래된 고안 도구 중 하나로 여겨 탑벽에 새기거나 사원의 등에 그렸으며, 북아프리카의 카빌 여인들은 이슬람교도지만 미간에 십자가 문신을 했다. 마야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멕시코의 팔렝케에는 ‘십자가 사원’이라 알려진 이교 사원이 있으며, 고대 멕시코인들도 십자가를 토타(tota, 우리 아버지)로 경배하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민족들이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를 종교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오랫동안 숭배되어 왔던 것이다. 이같이 지극히 비기독교적인 십자가가 기독교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배도한 교회들이 수많은 이교도들을 받아들였고 이들 이교도의 부호들과 상징들을 계속 보유하는 것을 광범위하게 허락한 것이다. 나아가 가장 자주 쓰이는 형태인 타우나 T의 십자가 조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용하도록 채택했다. 그리하여 431년 교회와 사무실 안에 십자가가 도입됐으며 AD 586년경 뾰족탑 위에 십자가를 세우게 됐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상징을 견고히 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다.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 환상’과 그에 이은 ‘개종’이 그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안(Milvian) 다리 전투를 앞두고 꿈을 꾸게 됐다. 십자가가 나타나 ‘정복의 상징’이라고 알려줬고 콘스탄티누스는 그 십자가를 깃발에 그려 진군한 결과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어 그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했다.
 
 
 
이러한 일화는 교회 내 십자가 사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교도의 상징인 십자가를 하나님과 연관 짓는 확실한 고리(?)를 만든 셈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의 십자가 숭배 사상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 환상과 개종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역사가 윌 듀런트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그의 개종은 진실된 것이었는가? 그것은 노숙한 정치적인 지혜의 발로였을 공산이 크다. 그는 그리스도인 예배의 의식적인 요구에 거의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주교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는 비록 제국의 단합에 관심을 두어 반대자들을 억압하고자 한다 해도 그리스도계를 휘젓는 신학적인 이견들에 관하여는 별 관심이 없었다. 통치 기간 중 그는 주교들을 정치적 조역자들로 취급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수단이 될 뿐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교 최고 지도자로서 이교 예배를 돌봐주고 그 권리를 보호해줬다고 한다. 그의 개종은 이교주의와 기독교를 하나로 연합하여 제국의 힘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십자가 또한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가시적 도구였다. 애초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희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water{하나님의교회}[하늘 어머니]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곳~
생명의 진리를 지키고 전하는 곳~
하늘 아버지 하늘 어머니께서 함께 하시는 곳
바로  하나님의교회 입니다.
하나님의교회로 ~ 초대합니다.
 
 
 
 
하늘어머니의 사랑이 있는곳
하나님의교회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오늘날 유일하게 성경대로 행하며
성경예언이 이루어 지는 교회
하나님의교회

2013년 8월 2일 금요일

{종교적 호더}-새언약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은혜와 진리로 가득한 하나님의교회
세상은 불법과 거짓으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의교회는 다릅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시대에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참과 진로로 세우신 교회이기때문이죠.
하나님의교회 오세요 분명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을 느끼시고 확실한 증거로 확실한 믿음에 거할수 있을겁니다. 세계속의 하나님의교회

 

 
 
 

"죽어도 못 버리는 종교적 호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매일 밖에 나가시면 꼭 뭐라도 들고 오신다.
할머니 댁은 집 마당에서부터 안방에 이르기까지 항상 물건으로 넘친다.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가 고물을 주워서 생계를 이을 수밖에 없는 분이라 생각했다. 길에서 만나면 더없이 다정히 웃어주시던 할머니기에 그 외에는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으랴.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저장강박(compulsive hoarding)을 앓고 있는 일명 호더(hoarder)였다.

빈병, 폐지, 플라스틱 등 쓸모없는 물건들로 벽을 쌓아놓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위안과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호더. 이러한 호딩장애(Hoarding Disorder)에는 물건에서부터 동물을 모으는 애니멀 호딩(Animal Hoarding),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모으는 푸드 호딩(Food Hoarding)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호딩장애는 단순히 ‘모은다’는 것만 생각하면 저장에 대한 강박증이라 볼 수 있지만 이들의 더 큰 문제는 죽어도 버리지 못하는데 있다.


그래서 호더들은 대부분 이웃이나 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호더들은 스스로도 “한계가 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왜 이들은 죽어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자니 또 다른 호더들이 생각난다. 죽어도 못 버리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
기성 종교인들이라 하겠다. 위에서 언급한 호더들은 가족과 이웃 간의 갈등을 겪는 게 다지만 종교적 호더들은 그들의 영혼이 파탄에 이른다. 죽어도 못 버리는 일요일 예배 성수가 그러하며, 죽어도 못 버리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그렇다. 이뿐이랴. 십자가 우상숭배는 어떤가.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도 있다. 성경에도 없는 사람의 계명들이다. 폐지나 빈병 같은 쓰레기에 불과한 이런 계명들을 죽어도 못 버리고 지키려 애쓴다. 사람의 계명을 차곡차곡 쌓아 지켜서 무엇에 쓸 것인가. 저장강박증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종교적 호더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세상은 온갖 불법으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의교회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새언약을 지킵니다.

갑과 을의 나라

 

 


갑과 을의 나라





이 세상은 슈퍼을(乙)을 아래로 둔 슈퍼갑(甲)의 세상이다.
비행기에서 추태를 부린 ‘라면상무’, 대리점주에게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보인 한 유제품업체의 ‘욕설팀장’, 주차문제로 호텔 지배인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한 ‘빵회장’ 등은 전형적인 슈퍼갑이다.

슈퍼갑은 ‘너 아니어도 사람은 많으니깐’이라며 을에게 부당한 계약과 대우를 한다. 을은 자신이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약해지’를 당할까 노심초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러운 을을 아래로 둔 막강한 갑의 세상’이다.

1971년 스탠퍼드대학교의 ‘감옥 실험’은 오늘날 갑을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대학의 심리학 교수 필립 짐바르도는 대학생 24명을 선발해 2주 동안 각기 죄수와 교도관 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들 대학생들은 미국과 캐나다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다.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을 위해 대학 건물 지하를 감옥처럼 꾸미고 학생들로 하여금 실제 감옥 같은 생활을 하게 했다. 이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에 빠르게 적응했다. ‘갑’인 교도관은 (실제로는 아무 잘못이 없는) ‘을’인 죄수를 정당한 이유도 없이 괴롭혔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이 그들의 변기통을 비울 수 없도록 했으며, 매트리스를 빼앗아 콘크리트 위에서 재우는 등 벌을 주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죄수들에게 벌거벗은 채 다니도록 강요하는 등 갖가지 성적 모욕을 줬다. 결국 14일로 계획됐던 실험은 6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막강한 힘을 가진 갑의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잔혹한 행위를 을에게 행사한다.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또는 나타내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갑과 을의 나라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갑일까, 을일까. 인류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절대적인 갑이다. 그러나 ‘특별한 갑’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4~6)

하나님께서는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갑이지만 그 힘과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인인 을을 위해 고난과 희생의 길을 걸으셨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셨다. 절대적인 갑이, 절대적인 을을 위해서 말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나라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라.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도서 7:2)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갔을 때와 장례식장에 조문객으로 갔을 때의 기분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엊그제까지도 멀쩡했던 지인의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왜, 어떻게 죽었는지 의문이 들면서 그것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을 때가 많다. 초상집 분위기와 잔칫집 분위기를 한마디로 침통과 상쾌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유명했던 지혜의 왕 솔로몬은 어떤 측면에서 왜 굳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했을까? 잔칫집의 하객 입장은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고 즐거운 마음과 은은한 음악, 기념촬영 등 맛있는 음식과 대화로 웃음이 넘쳐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초상집의 문상객은 만사를 제치고 고인이나 상주 또는 유족들에게 위문하러 온 입장이기에 마음이 무겁고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언젠가는 자신의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다시 한번 인생의 허무함을 실감하며 거울 보듯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기도 한다. 이처럼 잔칫집에는 웃음과 기쁨, 축하가 있지만 반대로 초상집에는 슬픔과 눈물 그리고 위로와 격려가 요구되는 곳이 아니던가.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는데 나사로는 죽어 하나님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부자도 죽어 장사된 후에 지옥의 고통에 시달리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 내용 중에는 부자가 죽어서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아직도 육신의 낙과 세상재미에 빠져있는 다섯 명의 형제들에게 미리 알려서 제발 이곳에는 절대로 오지 않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성경말씀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라는 말씀처럼 초상집에 가면 잔칫집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인생의 허무와 진실을 재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죽음은 엄연한 것이어서 영웅도 재벌도 피해갈 수 없고, 왕도 대통령도 어떠한 권력자도 거부할 수 없으며 절세미인, 인기 배우도 늙고 병들면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만하면, 웃고 끝나는 잔칫집보다는 인생에 대한 성찰을 심어주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이로운 일이 아닐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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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일 목요일

세상에 단하나 어머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교회"어떤 초대"

하나님의교회는요  하늘어머니 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그리고 성경예언에 따라 많은 열방의 민족들이 어머니 하나님께로 나아고는 그 예언이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하나님의교회로 오세요 오늘날 많은 교회가 타락하여 세속적이 되었지만 하나님의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유일하게 지키는 교회이기도 하지요! 어머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교회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어떤 초대                 


한 나라의 왕 혹은 대통령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퍽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런데 당신은 곧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게 될 것이다.


1937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 2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제목은 ‘신부 실종’이다. 기사는 혼인을 일주일 앞둔 신부 김영자의 행방을 찾는 내용이다.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신부가 없어지다니, 신랑과 가족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성경에도 이 사건과 흡사한 내용이 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잔치에 손이 가득한지라 ···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 (마태복음 22:1~14)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신부가 보이지 않는다. 신랑과 하객은 있는데 혼인잔치의 주인공이자 꽃이라 할 수 있는 신부는 어디로 갔을까. 혹자는 “성경의 신부는 성도들”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 주장이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 속 신랑은 예수님 자신이며 청한 사람들은 성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9:15, 마가복음 2:20, 누가복음 5:35)

이 말씀에서는 청한 사람들, 즉 성도를 혼인집의 손님들이라 비유하셨다. 하객을 불러놓고 신부 대신 결혼을 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성도는 결코 신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일까. 신부가 언급되지 않았던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천국 혼인잔치가 성대히 열리는 장면을 기록하며 아내, 즉 신부를 언급해놓은 책이 있다. 요한계시록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19:7~9)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리는 모습과 그의 신부, 청함을 받은 손님들을 계시로 보았다. 청함을 입은 복 받은 자들은 당연히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아내는 누구인가.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신부의 모습을 보고 싶은 사도 요한의 요청에 천사가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다. 이 하늘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보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신부를 일컬어 요한은 어린양의 아내라 했으며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다. 그 예루살렘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설명했다. 우리 아버지의 아내는 당연히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도인 우리는 과연 하늘 어머니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아버지 하나님만 믿어온 기성교인이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잣대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사야 62:6~7)

예루살렘을 일컬어 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계속 일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이 단순히 성벽이라면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말씀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사도 바울이 증거 한 우리의 어머니 즉, 하늘 어머니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예루살렘을 세운다고 하셨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영적 예루살렘이신 하늘 어머니는 아무나 세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섬기고 알아야 하는 하늘 어머니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세워줄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도 알려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22~23)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든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자 아담은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며 ‘여자’라 칭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에 아담과 하와는 단지 아담과 하와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로마서 5:14)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성경 맨 마지막에 ‘오실 자’에 대해 언급했다. 바로 예수님이다. 즉 아담은 오실 자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아담이 예수님을 나타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아담이 하와를 일컬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머니 하나님을 증거해 주실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세기 3:20)

또한 아담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준 것도 아담이다. 하와라는 이름의 뜻은 ‘생명’이다. 이 말씀은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하늘 어머니를 알려주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세워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영혼을 낳으시고 구원하실 하늘 어머니다.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 나아온 자들이 천국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복 받은 자들이다.

시온을 건설하라! _그리스도 안상홍님과 하나님의교회

-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는 오늘날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규례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난 하나님의교회는 새언약을 지키며 성령시대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하나님의교회 오셔서 생명수 축복 받으세요-




시온을 건설하라

30세에 왕위에 오른 다윗은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시온성을 정복했다.
이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다윗 왕과 2천 년 전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두 인물의 관계는 성경 곳곳에 예언과 성취로 나타나 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에스겔 37:24~25)


  사진출처[히스토리 채널 '사라진 세계']

에스겔 선지자는 다윗이 왕이 되리라고 예언했다. 난해한 점은 이미 다윗 왕이 죽은 지 약 45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이 예언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실제 다윗 왕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예언을 이루셨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누가복음 1:31~32)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실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후 그의 생애에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사무엘하 5:7~10)

30세에 왕위에 오른 다윗은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시온성을 정복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오랫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시온성이 다윗에 의해 정복되었다.

다윗의 이 역사를 또 다른 다윗인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루실까. 예언상 다윗이 곧 예수님이기에 다윗이 이룩한 시온성 건축 역사는 예수님께서도 반드시 이루셔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건축하실 시온성은 다윗이 세웠던 한낱 건축물이 아니었다.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이사야 33:20)

이사야 선지자는 시온을 두고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시온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건축할 시온은 바로 이런 곳이다. 다윗의 예언을 이루되, 무너져 없어질 건축물이 아닌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시온을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절기다.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 시온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시온을 세우기 앞서 먼저 하나님의 절기를 정립해주셨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절기에는 제자들과 함께 지킨 유월절, 초막절이 있으며, 사도들이 지킨 오순절에는 성령을 내려주셨다. 그리고 주간절기인 안식일이 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 26~28)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2, 37)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실지로 시온성을 정복하고 수축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절기를 정립해주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시온성을 건설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시온의 절기들이 사도시대 말경부터 차츰 변경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사단 마귀는 급기야 하나님의 절기를 모두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다니엘 7:25)

다니엘 선지자는 사단 마귀에 의해 하나님의 진리가 무자비하게 짓밟힐 것을 예언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성도가 괴롭힘을 당하고, 하나님의 때와 법인 절기와 계명들이 변개됐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시온성의 무너짐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시온성은 하나님의 절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 시온성이므로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시온성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사단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시온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절기들을 변경시킨 것이다.

AD 321년에 토요일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하고, AD 325년에는 유월절을 폐지, 이후 태양신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교회로 들여오므로 하나님의 절기는 모두 사라졌다. 하나님의 절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시온이 황폐화됨을 의미한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이사야 51:3)

다니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절기가 변경될 것을 예언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시온이 황폐할 것을 예언했다. 이는 같은 말씀이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살펴보면 시온이 다시 위로를 받을 것과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하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절기가 없으므로 절기를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도 없어 황폐했던 시온이, 다시금 절기를 지키는 백성들의 감사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시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모여 절기를 지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말일에 대한 예언 속에 시온을 언급했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가 4:1~2)

말일(末日)은 곧 마지막 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많은 민족과 이방들이 여호와의 산 곧 시온으로 몰려갈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초림 예수님께서 세워주셨던 시온은 사단에 의해 시련을 당하지만 결국 다시금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예언이다.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시편 102:16~22)

하나님께서 시온을 건설하시리라는 이 말씀 가운데 ‘건설’이 영어 성경에는 ‘rebuild’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재건’을 의미한다. 즉 이 시대 하나님께서 사단에 의해 무너졌던 시온을 다시금 세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온은 누가 세워주실까.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편 87:5)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시온은 다윗이 세웠으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절기 지키는 시온은 오직 하나님만이 세우실 수 있다. 초림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시온, 사단 마귀에 의해 무너졌던 시온은 오직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야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시온을 재건할까. 이는 초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절기를 정립함으로 시온을 세우셨던 것처럼, 재림 예수님께서도 사단에 의해 짓밟힌 하나님의 절기를 재정립함으로 시온을 세워주신다. 이는 시온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기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결코 무너졌던 시온이 재건될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절기를 회복해주심으로 시온을 재건해주신 이 시대의 구원자는 과연 누구일까.

무너진 시온을 다시 세워주신 재림 그리스도 안상홍님, 하나님의교회